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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행장, 제문

[월사집]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증시(贈諡) 문충(文忠) 이공(李公) 묘지명

by Hhgj 2022. 5. 6.

만력(萬曆) 무오년(1618, 광해군10) 5월 13일에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북청(北靑)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였다. 그해 8월에 포천(抱川)의 신향(辛向) 기슭에 귀장(歸葬)하고 궤연(几筵)이 동강(東岡)의 옛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는 교외(郊外)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이미 몇 줄의 글로 공의 묘표(墓表)를 지었고 또 1300여 자나 되는 장문의 제문(祭文)을 지어 곡(哭)하였다. 그리고 12년 뒤 기사년(1629, 인조7)에 태학사 장공 유(張公維)의 행장에 의거하여 서문을 쓰고 명(銘)을 붙인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공은 휘는 항복(恒福), 자는 자상(子常)이다. 그 시조에 이알평(李謁平)이란 분이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으로서 신라 시조를 옹립하여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마침내 계림(鷄林)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휘 제현(齊賢)이란 분이 있었는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고 세상에서 익재(益齋) 선생이라 일컫는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휘 연손(延孫)은 공조 참판이다. 이분이 휘 숭수(崇壽)를 낳았는데 첨지중추부사이다. 이분이 휘 성무(成茂)를 낳았는데 안동 판관(安東判官) 증(贈) 이조 판서이다. 이분이 휘 예신(禮臣)을 낳았는데 진사(進士) 증 좌찬성이다. 이분이 휘 몽량(夢亮)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 증 영의정이다.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으로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여 청검(淸儉)과 절효(節孝)로 이름났다. 현감(縣監) 최륜(崔崙)의 따님이고 눌헌(訥軒) 이공 사균(李公思鈞)의 외손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를 아내로 맞아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처음 태어났을 때 울지 않기에 집안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들어 보았다. 겨우 몇 살이 되자 총명이 비범하였고 성품이 침중하고 과묵하여 웃음과 말수가 적었다. 그래서 식자(識者)들은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이미 알았다.
8세에 부친 참찬공(參贊公)이 ‘검(劍)’과 ‘금(琴)’ 두 글자를 주며 대구(對句)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검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담겼어라.〔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하니, 듣는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9세에 부친 참찬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마치 성인(成人)처럼 집상(執喪)하였고 소식(蔬食)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14, 5세 때에 이미 재물을 가볍게 보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의기(義氣)를 중시하고 자질구레한 세행(細行)에 구애되지 않았다. 한번은 새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입고 싶어 하자 공이 즉시 자기 저고리를 벗어서 주었다. 공이 돌아와 대부인(大夫人)에게 말하기를 “남이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차마 옷 하나를 아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씨름과 축국(蹴跼)을 잘하여 큰 거리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패를 나누어 겨루며 용맹을 뽐내면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였다. 대부인이 이 사실을 듣고 준절(峻切)히 꾸짖으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분부를 받들고 그날로 놀이를 그만두고 평소의 행실을 고쳐 책을 읽고 통렬히 자신을 검속(檢束)하였다. 모친 최 부인(崔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상중(喪中)에 예법을 지키는 것이 더욱 각고(刻苦)하여 죽을 먹고 시묘(侍墓)하며 애훼(哀毁)가 지나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복(服)을 벗고 학궁(學宮)에 들어가서는 누차 윤제(輪製)에서 장원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상국(相國) 권철(權轍)이 그 소문을 듣고 공을 손서(孫壻)로 삼았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의 정자(正字)가 되고 사국(史局)의 검열(檢閱)로 선임되었다. 선묘(宣廟)께서 《강목(綱目)》을 강독하려 할 때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질문에 대답할 만한 재주 있는 신하를 미리 뽑을 것을 명하셨다.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이 공 등 다섯 사람을 천거하니, 내각본(內閣本) 《강목》 한 질씩을 하사하는 한편 시강(侍講)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른 일로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명하였으며, 이윽고 장기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그리고 옥당(玉堂)에 뽑혀 들어가 정자가 되어서는 이발(李潑)이 정여립(鄭汝立)과 결탁한 죄상을 논핵하여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이에 공은 질병을 이유로 세 차례 정고(呈告)하니, 선묘가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옥당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 사직소를 받지 말라.” 하였다.
박사를 거쳐 봉교로 이임하고 전적ㆍ정언에 승진하였으며, 추천으로 이조 좌랑ㆍ지제교에 배수(拜受)되었다. 수찬ㆍ정언ㆍ교리를 거쳐 다시 이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다.
기축년(1589)의 역옥(逆獄) 때 공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민첩하기가 나는 듯하고 변재(辯才)가 신명과 같으니, 선묘가 “고재(高才)로다, 고재로다.”라고 자주 칭찬하고 매사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부르니, 다른 관료들은 팔짱을 낀 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저 입에 침이 마르게 찬탄할 뿐이었다. 대신(大臣)의 헌의 때마다 공이 주선하여 평번(平反)한 바가 많았다. 응교로 승진하고 검상(檢詳), 사인(舍人)에 천거되었다.
경인년(1590)에 문사 낭청으로 있을 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추충분의평난 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를 받고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한번은 경연에 입시(入侍)했을 때 선묘가 공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국옥(鞫獄) 때의 일을 얘기해 마지않았으며, 얼마 뒤에 준질(準秩)을 명하여 직제학으로 승진하였으며, 또 특명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동부승지로 승진하였으니, 장차 공을 크게 쓰기 위한 것이었다.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서 장원하여 구마(廏馬)를 하사받았다.
신묘년(1591)에 체직되어 호조 참의가 되었다.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일이 잘 다스려져서 창고가 충실해지니, 판서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문한(文翰)에 종사하는 선비가 전곡(錢穀)의 업무를 이처럼 잘 처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참으로 통재(通才)로다.” 하였다. 얼신(蘖臣) 홍여순(洪汝諄)이 송강(松江) 정공 철(鄭公澈)을 모함하여 당대의 사류들을 거의 다 유찬(流竄)하고, 이어 송강의 죄목을 방(榜)에 써서 조당(朝堂)에 내걸었으며, 승지로서 봉행(奉行)에 태만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여름에 서용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풀려는 자가 공을 더욱 심하게 모함하여 장차 중죄(重罪)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극력 구원하여 일이 무마되었다. 도승지로 서승(序陞)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적이 침공한다는 보고가 이르자 공은 밤낮으로 공무를 보면서 국가를 위해 순절(殉節)하리라 맹세했다. 퇴청(退廳)해서는 외사(外舍)에 거처하며, 집안일은 일절 상관하지 않게 할 것을 명하였다. 병든 첩이 한 번만 만나 뵙고 영결(永訣)하고 싶어 해도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도성을 떠나 몽진(蒙塵)하던 날, 비가 내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신료들은 아직 모이지 않고 중전께서 홀로 여시(女侍) 수십 명과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을 나가셨는데 공이 홀로 등촉(燈燭)을 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날 밤, 어가(御駕)가 임진(臨津)을 건넜는데 짐꾼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자 공이 진흙탕 속을 걸어 다니며 불러 모았다. 그리고 어가를 호종(扈從)하여 삼경(三更)에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렀다. 상이 공을 불러 입시하게 하는 한편 대신(大臣) 및 윤두수(尹斗壽)를 재촉해 불러 계책을 물었다.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병력으로는 이 적을 막을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가서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하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내 생각도 본래 그러하다.” 하였다.
송경(松京)에 도착하자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에 승진시키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한 다음 왕자를 호종하여 먼저 평양(平壤)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은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다는 것을 내가 평소에 알고 있으니, 경들과 함께 왕자를 호종하게 하라.” 하였다.
어가가 평양에 이르자 하교하기를 “이모는 충직하고 성실하니, 의당 승탁(陞擢)하여 중임을 맡겨야 한다.” 하였다. 얼마 뒤에 형조 판서와 대사헌에 배수되었다.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속히 천조(天朝)에 상주(上奏)할 것을 다시 청하고, 또 삼도(三道)에 조도관(調度官)을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여 천병(天兵)의 군량을 조달하게 할 것을 건청(建請)하였으니, 국가를 다시 회복한 공업이 실로 여기에 기반한 것이었다.
병조판서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兵曹判書弘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에 배수되었다. 임진(臨津)이 적에게 함락되자 군신(羣臣)들이 함흥(咸興)으로 행행(行幸)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윤상 두수(尹相斗壽)와 함께 말하기를 “이 성을 지킬 수 없으면 영변(寧邊)으로 행행해야 할 것이다. 한번 북령(北嶺)을 넘어가면 곧 상국(上國)과 멀리 떨어지게 될 터이니, 다시 누구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적이 패수(浿水)로 핍박해 들어오자 한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적장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만나 진격을 늦추어 줄 것을 청하고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몰래 용사(勇士)를 데리고 가서 두 적장의 목을 베어 오겠소.” 하였다. 공이 만류하기를 “당당한 국가가 어찌 도적의 꾀를 쓸 수 있겠소.” 하니, 계획을 그만두었다.
어가가 영변에 이르렀다. 공이 ‘구원병을 청하러 요동(遼東)에 가겠다.’라고 자청하였고, 한음도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하였는데, 심공 충겸(沈公忠謙)이 말하기를 “이모는 바야흐로 병조 판서로 있으니, 가서는 안 된다.” 하여 마침내 덕형(德馨)을 보냈다. 공이 서문(西門)까지 전송하여 자신의 참마(驂馬)를 풀어 주며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자네는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하네.” 하자, 한음이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의 해골이 노룡(盧龍)에 버려질 걸세.” 하니, 듣는 사람 모두 안색이 바뀌었다.
강탄(江灘)의 아군이 무너지자 선묘께서 밤에 신료들을 불러 중국에 귀부(歸附)하는 문제를 의논하며 하교하기를 “부자가 함께 압록강을 건너가면 국사가 가망 없게 될 것이니, 세자는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분조(分朝)하여 가라. 나는 약간의 신료를 데리고 의주(義州)로 들어갈 것이다. 나를 따를 사람은 누구인고?” 하니, 신료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신은 이미 부모가 없고 질병도 없으니, 따르겠습니다.” 하니, 상의 안색이 바뀌었다.
어가가 박천(博川)에 머물고 있을 때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이르렀다. 이에 어가를 재촉하여 밤에 출발하니, 호종하는 신하들이 도중에 많이 도망쳤다. 마침 비는 내리고 캄캄한 밤중이었다. 공은 창졸간에 변고가 생길까 염려하여 급히 말을 몰아 앞에서 길을 인도하니, 상이 더욱 공을 신임하였다.
정주(定州)에 이르렀을 때 공은 ‘며칠 머물며 적의 소식을 기다리고 먼저 신하 한 사람을 보내 의주의 부로(父老)들을 위유(慰諭)하는 한편 중국의 요광(遼廣)으로 자문(咨文)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할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다.
의주에 이르니, 백성들이 놀라 흩어지고 있었다. 공이 관청을 수리함으로써 오래 주둔할 뜻을 보일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며칠 만에 차츰 백성들이 돌아와 모여 행궁(行宮)의 모양이 갖추어졌다. 공이 또 말하기를 “한남(漢南)의 각 지방에서는 필시 ‘어가가 이미 요동으로 건너갔다.’ 하며 백성을 선동하여 난리를 일으키려 할 터이니, 급히 사신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선유(宣諭)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의 명령이 호남과 영남에 통하게 되어 관군과 의병이 자못 군대를 정비해 달려왔고, 국세(國勢)가 이에 힘입어 진작되었다.
당시 요동에서는 “조선이 왜인(倭人)을 끌어들여 천조(天朝)를 침공하려 한다.”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중국의 병부(兵部)가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와 사실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황응양이 처음에는 몹시 의심하였다. 공이 도성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염려하여 신묘년(1591, 선조24)에 왜추(倭酋)가 보내온 오만 무례한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다가, 이때에 그것을 보여 주었다. 황응양이 그 국서를 보고 가슴을 치고 크게 통탄하며 말하기를 “귀국(貴國)이 중조(中朝)를 대신해 병화(兵禍)를 입었는데 도리어 오명(汚名)을 받았구려.” 하고, 중국에 돌아가 석 상서(石尙書)에게 보고하며 실상을 통렬히 진달하였다. 이에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는 일이 비로소 결정되어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이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선발대로 조선에 오니, 조정이 든든하게 믿었다. 그러나 공은 홀로 말하기를 “조승훈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지모(智謀)가 없으니, 군대가 반드시 패전할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평양에 진병(進兵)하였다가 과연 패주하고는 도리어 ‘조선이 왜적을 도왔다.’라고 무함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大臣)을 보내 변무(辨誣)할 것을 청하는 한편 서둘러 대병(大兵)을 보내 주길 요청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을 수복하자 경성(京城)의 적도 후퇴하였다. 공이 환도(還都)할 것을 힘써 청하니, 10월에 어가가 경성으로 돌아왔다. 백관은 비록 하릴없이 담장만 의지하고 있었으나 군정(軍情)은 공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였다.
중국의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명을 받들고 올 때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도에 영접하였다. 천조(天朝)의 칙유(勅諭)에 “세자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가서 그 지역의 군무(軍務)를 맡으라.”라고 했기 때문에 공은 병조 판서로서 접반사를 사임하고 세자를 배종(陪從)하여 남행(南行)하였다.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모반하자 관료들이 세자를 모시고 상경(上京)함으로써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학가(鶴駕)가 남하(南下)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지(潢池)의 작은 역적 때문에 소명(召命)이 있지도 않은데 허겁지겁 상경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의당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사중(士衆)을 독려하고 속히 토벌하여 군부께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역모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사람이 줄을 잇자 공이 아뢰기를 “역적은 조수(鳥獸)나 어별(魚鼈)처럼 곳곳마다 늘 나오는 것이 아닌데 어찌 이처럼 많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옳다고 하였다.
을미년(1595)에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 일본을 책봉(冊封)할 때 부사(副使) 양방형(楊方亨)이 공을 접반사로 삼고자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공은 조정을 떠날 때 동전(東銓)과 문병(文柄)에서 해임되고 우참찬에 배수되었다. 양방형이 공을 공경하여 예로써 대우하며 말하기를 “동국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정유년(1597)에 다시 병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중국의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가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오면서 호조ㆍ병조ㆍ공조의 판서를 만나고자 하였다. 공이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양 경리를 영접할 때 응대가 주밀(周密)하고 민첩하니, 양 경리가 칭찬하였다.
공은 모두 다섯 차례 병부의 수장이 되어 안으로는 국난을 평정하고 밖으로는 천장(天將)을 응접하였는데 재략(才略)이 기의(機宜)에 맞아 일 처리가 여유로웠으며, 전주(銓注)가 공명(公明)하여 무장(武將)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늘 만 필의 베를 비축해 두어 수용(需用)에 대비했다. 그래서 양 경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라 하며 공을 불렀다.
찬획(贊劃) 정응태(丁應泰)가 무함하는 주문(奏文)을 올려 우리나라를 탄핵하니, 선묘께서 크게 놀라 합문(閤門)을 닫고 정사(政事)를 보지 않았다. 신료들이 의논하기를 “대신(大臣)이 가서 변무해야 한다.” 하였는데 수상(首相)인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즉시 출행을 청하지 않았다. 선묘께서 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임명하여 진주 정사(陳奏正使)로 삼았고 나는 부사(副使)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둘러 중국으로 가서 진주(進奏)하니, 황상(皇上)이 정응태의 소장을 아울러 하달하고, 오부(五府)ㆍ육부(六部)ㆍ구경(九卿)ㆍ과도(科道)에게 명하여 우리의 주문(奏文)을 함께 심의(審議)하게 하였다. 공은 일행의 제관(諸官)과 함께 날마다 동각(東閣)에 가서 주문을 올려 사실을 진달하였는데, 그 글의 사어(辭語)가 매우 개절(凱切)하여 중국의 관료들이 보고 탄복하는 이가 많았다. 중국의 관료들이 복주(覆奏)하여 우리의 국치(國恥)를 후련히 씻게 되었다. 황제가 명하여 정응태를 파직하여 민적(民籍)에 넣게 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장려하는 뜻의 칙유(勅諭)를 내리니, 선묘께서 크게 기뻐하여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당시 의정부의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화의(和議)를 주장했는데 공은 자핵(自劾)하는 소장을 올려 “일찍이 화의에 동참했으니 감히 요행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다. 소장이 무려 열네 번이나 올라가서야 체직되었다. 선묘가 하교하기를 “사람들과 함께 일해 놓고 마침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는 것은 이모(李某)의 죄인이다.” 하였다.
경자년(1600)에 도체찰사(都體察使)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호남과 영남의 각 지방을 선무(宣撫)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安民〕’, ‘해상을 방어할 것〔防海〕’ 등 열여섯 가지 책략을 올렸다. 여름에는 영상으로 조정에 소환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여(喪輿)를 모시고 산릉(山陵)에 갔는데 궁인이 밤중에 실화(失火)하여 영악전(靈幄殿)을 불태우고 말았다. 이에 공이 예관(禮官)에게 방도를 지시하여 양사(襄事)를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이 법도에 맞게 마쳤다.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이 국서를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오랑캐는 천조로부터 작위를 받았으니, 본국에서는 의리상 사사로이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제하면 반드시 후일에 우환거리가 될 것이니, 그 사신을 사절하소서.” 하였다. 선묘가 호종 공신(扈從功臣)을 봉하면서 공을 원훈(元勳)으로 삼으니,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고사(固辭)하였다. 선묘가 “외로운 충성과 굳은 절개는 실로 조종(祖宗)의 충신이다.”라는 말로 하유(下諭)하고,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扈聖功臣)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임인년(1602)에 간신(奸臣)이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하여, 그 무리 문경호(文景虎)를 시켜 상소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였습니다.” 하면서 서로 소장을 올려 죄를 청하였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차자를 올려 극력 진달하기를 “최영경이 체포될 때 성우계는 파주(坡州)에서 서찰을 보내 그를 구해 주려고 힘썼으니, 문경호의 소장은 거짓으로 꾸민 말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하였다. 차자가 올라가지 않았을 때 간신이 권신의 지시를 받아 상소하여 공을 공격하고 공을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공은 인책하여 사직소를 일곱 번이나 올린 끝에 면직되었다. 공은 비록 벼슬을 떠났으나 선묘의 예우(禮遇)는 줄지 않아 중대한 일은 반드시 공에게 자문하였다.
갑진년(1604)에 차자를 올리면서 시정(時政)의 궐실(闕失)을 극론하였다. 대마도(對馬島)의 추장 평의지(平義智)가 거짓으로 두 사수(死囚)를 결박하고 임진년에 능(陵)을 범한 도적이라 하면서 바치고 화친을 청하였다. 이에 공은 두 사수를 경상(境上)에서 죽이고자 하였으나 유영경(柳永慶)은 자신의 공으로 삼아 자랑하고자 두 사수를 심문할 것을 힘써 청하였다. 그리하여 심문하였으나 결국 아무 소득이 없었다.
김계(金稽)란 자가 사주를 받고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봉(追封)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 일을 하달하자 공이 의론하기를 “이 일을 실행한 이는 한(漢)나라 애제(哀帝), 안제(安帝), 환제(桓帝), 영제(靈帝)이고, 이 일을 그르다고 한 이는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입니다.” 하니, 분분하던 의론이 가라앉았다.
임해군(臨海君)은 선묘의 왕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고 거처하는 곳도 궁궐과 가장 가까웠는데 집안에 무뢰배들을 모아 두었다. 마침 도적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熙緖)를 죽였는데 포도대장(捕盜大將) 변양걸(邊良傑)이 그 옥사(獄事)를 끝까지 추궁해 밝히려 하다가 폄직되었다. 수상(首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소장을 올려 변양걸을 구원하려다 상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고 공이 대신 영의정이 되었다. 공은 차자를 올려 누차 사양하며 말하기를 “변양걸이 폄직된 일에 대해서는 신도 실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는데, 단지 미처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덕형은 곧 이미 말한 신이고 신은 곧 아직 말하지 않은 이덕형입니다.” 하였다. 소장이 여덟 번이나 올라가서야 체직되었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화(禍)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교묘한 유언비어로 선동하니 중외(中外)의 많은 사람들이 의혹하고 정인홍의 소장이 들어갔다. 광해(光海)가 왕위를 이어받자 임해군에 대해 쌓인 의혹이 더욱 심해져 군사를 모아 대궐을 호위하게 하고 궁문을 낮에도 열지 않았다. 삼사(三司)가 임해군의 불궤(不軌)한 죄상을 밀계(密啓)하고자 하여 간장(諫長 대사간(大司諫))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복상(服喪) 중인 왕자를 죄적(罪迹)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처형한단 말인가.” 하니,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겼으나 계획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옥사가 장차 갖추어지려 할 때 공이 수상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더불어 ‘동기간에 은의(恩義)를 온전히 지켜야 한다.’라는 뜻을 극력 진달하여 임해군이 마침내 교동(喬桐)에 유찬(流竄)되었다. 그러나 언자(言者)들이 공의 말을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지목하여 이 말이 마침내 사대부들에게 화를 끼치는 장본이 되었다.
산릉(山陵)의 자리가 이미 정해졌는데 기자헌(奇自獻)이 요술(妖術)을 따라 자리를 고치려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통렬히 변박(辨駁)하였다.
4월에 좌상 겸 도체찰사에 배수되었다. 삼사(三司)가 임해군을 주벌할 것을 청하자 공은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을 지켰다.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공을 공격하였고, 이에 공도 거듭 차자를 올려 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선정(先正)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를 문묘(文廟)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고 헐뜯으니, 태학의 유생들이 글을 올려 송변(訟辨)하는 한편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제명하였다.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호소하자 광해가 일을 주도한 유생을 금고(禁錮)할 것을 명하니, 태학의 유생들이 권당(捲堂)하여 떠났다. 공이 이 사실을 듣고 경악하여 말하기를 “망국(亡國)의 거조로다.” 하고 거듭 차자를 올려 진달하니, 정인홍의 무리들이 공에 대해 크게 앙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공이 맡은 체찰부(體察府)의 병권(兵權)이 너무 무겁다고 주장하여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에 빠뜨리고자 하니, 공도 매우 다급하고 절박한 내용의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소장이 무려 스무 번이나 올라갔으나 끝내 윤허가 내리지 않았다.
임자년(1612)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은 강직한 태도를 지켜 일에 따라 억울한 죄명을 바로잡아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시인(詩人) 권필(權鞸)이 시어(詩語) 때문에 죄망(罪網)에 걸려 체포되니, 공이 매우 간절하게 울며 선처(善處)를 호소했으나 광해군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천도(遷都)를 청하자 공이 홀로 헌의하여 그 요설(妖說)을 타파하니, 천도 계획이 무산되었다.
계축년(1613)에 흉측한 무리가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를 꾀어 고변(告變)하게 하니,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역모로 무함을 받아 합문(闔門)에서 사형을 받았다. 무인(武人) 정협(鄭浹)이 공사(供辭)에서 다른 사람들을 연루하여 죄 없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공은 일찍이 정협을 변방의 수령으로 추천했다는 이유로 도성 밖에 나가 대죄하다가 사자(使者)를 세 번이나 보내 소명(召命)을 전달하기에 국청(鞫廳)에 참가했다.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겨우 8세였는데 삼사가 역적의 수괴(首魁)로 지목하여 서로 소장을 올려 주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의정부만이 유독 정청(廷請)하지 않으니, 군소배(羣小輩)들이 이를 갈며 미워하여 장차 불측한 화를 당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두 재신(宰臣)이 연일 밤 공의 처소에 와서 화복(禍福)으로 협박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선조(先朝)의 두터운 성은을 입고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차마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 스스로 명의(名義)를 훼손하겠는가.” 하였다. 양사(兩司)의 장관이 국청(鞫廳)의 탑전(榻前)에서 강경한 어조로 진언하기를 “군의(羣議)가 대신이 복합(伏閤)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 하기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물러 나오니, 한음(漢陰)이 뒤따라 나와 말하기를 “정신(廷臣)들의 의론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먼저 화를 당하게 될 것일세. 자네는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예(禮)에 ‘내란(內亂)은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무엇 하러 굳이 영창(永昌)을 위해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영창을 단지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 정도로 그친다면 나도 뜻을 굽혀 따를 것일세. 그러나 기필코 삼사의 주장대로 한다면 이견(異見)을 세우지 않을 수 없네.” 하였다. 수상 한음이 드디어 백료(百僚)를 모아 ‘인에 근본하고 의에 따라 결단하여 궐외(闕外)로 내쫓는다.〔本仁斷義 出置闕外〕’라는 말로써 의론을 삼았다.
이에 권신(權臣)이 불만을 품자 장령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드디어 폐모론(廢母論)을 내놓으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구나. 영창을 위해 죽는다면 용맹을 손상하고 모후(母后)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의리를 손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춘추(春秋)》를 터무니없이 인용하고 있으니, 내가 그 경문(經文)을 인용하고 그 의리에 의거하여 조목조목 공파(攻破)해야겠다.” 하고, 차자(箚子) 한 통을 올리며 영창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함께 언급하였다. 이날 저녁, 공은 자택에 가서 조의(朝衣)를 벗지 않은 채 외랑(外廊)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무너져 없어졌으니, 내가 대신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공을 찾아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대(萬代)의 첨앙(瞻仰)이 이 한 거사에 있을 것이오.” 하였다. 최유원은 평소 공을 존경하던 터라 곧 의론을 결정하고 이지완(李志完)ㆍ김지남(金止男)과 더불어 정조ㆍ윤인과 의론을 달리하였으니, 폐모론이 즉시 결행되지 못한 것은 공의 힘이었다.
공이 차자를 갖추어 장차 올리려 할 때 정협(鄭浹)이 죄상을 자백하니, 헌납 유활(柳活)이 정협을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공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즉일로 하인 한 명에게 말고삐를 잡게 하고 동문(東門)을 나가 동교(東郊)에 우거(寓居)하며 고서(古書)에 침잠하여 마음을 달래고 틈이 나면 산수를 배회하였고, 양식이 부족해도 늘 태연하였다. 대관(臺官)이 누차 공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지 재상을 체직하고 서추(西樞)에 제수하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공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정사년(1617) 겨울, 폐모론이 이미 결정되자 공은 강개(慷慨)하여 음식을 들지 않고 있었는데 홀연 큰 우레가 집을 뒤흔들었다. 공은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와서 수의(收議)하였다. 공은 병석에 누웠다가 부축을 받고 일어나 붓을 휘둘러 쓰기를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책을 낸 자가 누구입니까? 요순(堯舜)의 도리가 아니면 임금께 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옛날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부모가 늘 우순을 죽이고자 하여 우물을 파게 하고 곳집을 수리하게 하는 등 위태하고 도리에 어긋난 짓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하늘을 부르며 울고 원모(怨慕)할 뿐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으니, 진실로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못할지라도 자식이 불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춘추》에 자식은 부모를 원수로 삼는 의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급(伋)의 처(妻)가 된 사람은 바로 백(白)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겠습니까. 지금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려 나라 안에 장차 교화가 퍼질 가망이 있는 때에 이러한 말이 어찌 성상의 귀에 이른단 말입니까. 오늘에 해야 할 도리로 말하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 효로써 화합하여 차츰 바로잡고 노여움을 되돌려 자애가 되게 하시는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하였다. 공의 의론이 조정에 들어가자 이를 보는 이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떨구었고 저리(邸吏)가 공의 의론을 기록할 때 두려움에 손이 떨려 붓을 제대로 쥐지 못하였다. 삼사(三司)가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할 것을 청하니, 모두 네 곳으로 배소(配所)가 바뀐 끝에 삼수(三水)에 유배하기로 했다가 북청(北靑)으로 찬축할 것을 명하였다.
무오년(1618) 1월에 배소에 당도하였고, 5월에 병이 들었다. 공의 꿈에 선묘(宣廟)가 소명을 내리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오래지 않아 죽겠구나.” 하였다. 노추(奴酋)가 요광(遼廣)을 침범하였는데 우리의 군사가 구원하러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가 강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이틀 뒤에 졸(卒)하니, 춘추(春秋)가 63세였다.
공은 일찍이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나는 대신으로서 이러한 견책을 받았으니, 죽으면 조의(朝衣)로 염습하지 말고 단지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쓰라.” 하였다. 그해 8월 4일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에 공을 안장하였다. 원근에서 부음을 듣고 와서 곡하는 사람, 부의(賻儀)를 가지고 와서 조곡하는 수령과 변장(邊將), 애도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술잔을 올리는 사대부 등이 그 숫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혹 공과 면식(面識)이 없는데도 천리 밖에서 와서 곡(哭)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북청과 포천의 유생들이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를 모셨는데, 시의(時議)가 이를 막았으나 끝내 막을 수 없었다.
부음이 들리자 광해(光海)가 복작(復爵)하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중외(中外)에서 부음을 들은 사람들이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목 놓아 곡하는 이도 있었다.
공은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이 지성에서 나와 집안에서의 행실이 고인(古人)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젊을 때 한 기녀(妓女)를 좋아하여 자못 정에 빠졌는데 홀연 생각하기를 ‘연정을 두면 마음에 해가 된다.’ 하고는 벗들을 모아 놓고 시를 지어 기녀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으며, 이후로는 일절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입조(立朝)한 지 40년 동안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누차 이름이 훈적(勳籍)에 올랐으나 집안에는 한두 섬의 비축해 둔 곡식도 없었다. 조정에 당파들이 서로 배척하여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도를 부지(扶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혹 어느 한쪽으로 표방하는 듯이 보였으나 공 자신은 시비(是非)의 밖에 초연히 특립(特立)하였다.
공의 문장은 기(氣)를 위주하고 준일(俊逸)을 숭상하여 뜻이 가는 대로 즉시 글이 이루어져 마치 애써 구상(構想)하지 않은 듯했으나 베틀에서 짜낸 베와 같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의 글의 편언척자(片言隻字)라도 얻으면 많이들 소중히 보관하여 진귀한 보배로 여겼다. 주소(奏疏)는 양한(兩漢)의 경지에 근접하였고, 필법은 더욱 호건(豪健)하여 법도가 있었다. 소싯적에 제가(諸家)의 전적을 두루 섭렵하여 이미 그 뜻에 박통(博通)하였으나 끝까지 궁구하려 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성리학의 군서(羣書)를 좋아하였으나 역시 전주(箋註)와 같은 말단에 자질구레하게 얽매이지 않았다. 고요히 한거(閑居)하며 학문에 침잠하여 더욱 자득(自得)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 및 치욕(恥辱)ㆍ서상(書牀)ㆍ양야(養夜)ㆍ계주(戒晝)ㆍ경석(警夕) 오잠(五箴)을 지어 벽에 써 놓았으니, 공의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또 이와 같았다.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과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 주의(奏議)와 계사(啓辭) 각 2권,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세상에 간행되어 있다.
공은 젊을 때는 호를 필운(弼雲)이라 하였고 만년에는 호를 백사(白沙)라 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는 성남(星男)이고 둘째는 정남(井男)으로 임자년(1612, 광해군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두 벼슬하여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은 사인(士人) 윤인옥(尹仁沃)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2남 2녀를 낳았다. 첫째 규남(奎男)은 계축년(161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둘째는 기남(箕男)이다. 첫째 딸은 학관(學官) 권칙(權侙)에게 출가하였고, 한 딸은 어리다.
성남은 초취(初娶)로 판서 권징(權徵)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녀 1남을 낳았다. 딸은 진사 최욱(崔煜)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시중(時中)이다. 계취(繼娶)로 판관 김계남(金季男)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3남 4녀를 낳았다. 장녀는 사인 이정환(李廷煥)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인 남두상(南斗相)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은 시정(時挺)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정남은 참의(參議) 윤의(尹顗)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술(時術)이고, 딸은 사인 정지화(鄭知和)에게 출가하였다.
규남은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행(時行)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기남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공의 광명(光明)한 의표(儀表)와 간결(簡潔)한 조행은 마치 상서로운 구름과 태양 같아서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을 지탱할 듯한 높은 공훈, 충효의 대절(大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업적, 정대(正大)한 의론은 국가의 시귀(蓍龜)가 되고 사림의 관면(冠冕)이 되니,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태사(太史)가 기술하여 명성이 중화(中華)에까지 넘치고 덕택(德澤)이 백성들에게 남아 있다. 나의 변변찮은 몇 마디 말을 기다려서야 선양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공과 깊은 정의(情誼)로 친교를 맺어온 지가 30여 년이다. 처음 낭관(郞官)이 되고 중도에 요속(僚屬)이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서로 뜻을 모아 함께 일했었다.
공은 평소에는 그저 온화하게 담소하는 모습이 온통 한 덩이 화기(和氣)와 같지만, 큰 의론이나 큰 시비(是非)에 이르러서는 의연히 벼랑처럼 우뚝하여 만 마리의 소가 끌어도 그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이윽고 공과 함께 위난(危難)할 때 사명(使命)을 받고 중국에 갔으며, 계축년(1613, 광해군5)에 화(禍)가 일어났을 때에도 나는 체포되었고 공도 재상에서 파면되었다. 무오년(1618)에는 공이 먼저 북방으로 유배되었고 나는 교외(郊外)로 찬축되었다. 따라서 전란으로 간난(艱難)할 때 및 사행(使行)의 긴 여정, 한가로이 지낼 때를 거치며 내가 공과 종유한 시간이 누구보다 길다. 그 호탕한 풍모, 활달한 기상과 걸출한 시구(詩句), 통쾌한 청담(淸談)이 언제 어디서나 넘쳐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고 경도(傾倒)하게 하였다. 그중 나만 홀로 알고 흠탄(欽歎)한 것 한두 가지를 기록해 보겠다.
공이 노촌(蘆村)에 있을 때 내가 아들 명한(明漢)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찾아가니, 공은 흔연히 맞이하며 말하기를 “내가 도봉산(道峯山)의 천석(川石)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마음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군이 마침 왔구려.” 하고는 도건(道巾)을 쓰고 망혜(芒鞋)를 신고 나귀를 타고 가서 명승(名勝)을 두루 구경하고 함께 침류당(枕流堂)에 유숙했다. 삼경(三更)에 달이 떠오를 때 나는 바야흐로 피곤하여 누워 있는데 공이 나를 발로 차며 말하기를 “달빛이 저토록 밝은데 어찌 잠만 잔단 말이오.” 하고 나를 데리고 시냇가로 나갔다. 공이 홀연 서글픈 기색으로 말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명한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외고 또 〈적벽부(赤壁賦)〉를 외게 하니, 표연(飄然)히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생각이 있었다.
정사년(1617) 겨울에 이르러 흉론(凶論)이 더욱 기세를 떨쳐 폐모(廢母)를 청하는 논의가 사면에서 일어났다. 진호선(陳好善)과 전형(全瀅) 등이 먼저 공과 나를 주벌할 것을 청하였다. 내가 필마로 새벽에 도성을 나가 동강(東岡)으로 공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화색(火色)이 몹시 급박하니, 우리들에게 먼저 수의(收議)하게 될 것입니다. 금일의 일은 다른 의론을 내는 자는 죽고 의론을 내지 않는 자는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녹(祿)을 받으며 재직 중이니 이치상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공은 이미 조정을 떠나 계시니 병중(病中)인 사람에게는 수의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니, 공이 수염을 쓰다듬고 웃으며 말하기를 “사생(死生)은 운명입니다. 그리고 상이 필시 우리를 죽이지는 못하실 터이니, 남쪽이든 북쪽이든 서로 멀지 않은 곳으로 찬축되면 다행일 것이오.” 하였다. 나는 공의 뜻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입으로 불러 짧은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는데, 그중에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로써 영결(永訣)하기에 충분하다.” 하고, 드디어 손을 맞잡고 이별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 공의 의론이 올라갔고, 다시 한 달 뒤에 공은 귀양 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공의 행장에는 실리지 않았고 나만 아는 것이기에 여기에 함께 기록해 둔다.
공의 풍류와 문채(文采)는 완연히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 공의 무덤에 나무가 이미 굵어졌으니,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다시 이분을 뵐 수 있으랴. 오호라, 다시는 이분을 뵐 수 없구나.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량은 천 년 전의 시조요 / 沙梁千載
익재가 가업을 일으켰어라 / 益齋倡業
정기가 모이고 신령이 내려와 / 聚精降靈
공이 또 우뚝이 일어섰도다 / 公又挺立
우리 공이 세상에 태어남에 / 我公之生
하늘이 온갖 재능 갖춰 주었지 / 天具衆美
그래서 멀리 세속에서 뛰어나 / 曠乎拔俗
그 덕이 오로지 순수하였으니 / 粹然離滓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모습이요 / 威鳳之祥
정금과 같은 존귀한 인격이었지 / 兼金之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난 그 재주 / 絶人才猷
세상을 덮을 호걸스런 그 기운 / 蓋世豪氣
중론을 진압하는 그 큰 도량 / 鎭物之量
침착하고도 원대한 그 자품은 / 凝遠之姿
바다처럼 드넓어 다할 수 없고 / 海不可窮
산처럼 무거워 옮길 수 없었어라 / 山不可移
그리하여 석갈했을 때로부터 / 爰自釋褐
사람들이 신선인 양 바라보았지 / 望若神仙
그 당시에는 선묘께서 / 維時宣廟
정치에 힘써 어진 인재 찾을 때 / 勵精求賢
공을 만난 것이 늦었다 하시고 / 謂公見晩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셨으며 / 暇以讀書
한 부의 《강목》을 진강할 때 / 一部綱目
그대가 나를 도와 달라 하셨으며 / 汝其佐予
공을 옥당의 벼슬에 제수하고 / 盛之玉堂
관리의 일을 시키지 말게 하셨지 / 不役以吏
만나는 일마다 능숙하게 처리하니 / 遇事刃發
이는 공이 잠시 재능을 펼친 것이지 / 亦公暫試
그러나 국가가 그만 환난을 만나 / 運屬艱虞
공을 병조 판서의 자리에 발탁하자 / 擢公中兵
공은 한 손으로 국가를 부지하여 / 隻手扶天
제왕의 사직이 다시 밝아졌으니 / 黃道重明
그리하여 중흥의 위대한 공렬은 / 中興偉烈
우뚝이 높아 고금에 으뜸이어라 / 卓冠今昔
많고 많은 업무가 앞에 가득해도 / 萬務盈前
공은 담소하며 말끔히 처리하여 / 談笑掃却
마치 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는 듯 / 如雲過空
한 점 오랑캐 기운 남겨 두지 않았지 / 不留一氛
이에 국가의 문장을 관장하고 / 乃主文盟
이에 국가의 군무를 관장하니 / 乃登師垣
내직에 들어와선 왕명을 빛내고 / 入煥皇猷
외직에 나가선 무략을 펼쳤어라 / 出宣戎略
급기야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 乃秉國鈞
조정에서 백관들의 사표가 되니 / 儀刑百辟
나라에 큰 예식이 있을 때나 / 國有大禮
시국에 큰 의론이 있을 때에는 / 時有大議
공이 한마디 말로 결단하여 / 公一言決
경전의 의리를 인용하였었지 / 引經傳義
험난한 때 만나면 그만두어 / 遇坎則止
종일을 기다리지도 않았나니 / 不竢終日
큰 녹봉을 헌신짝처럼 버려 / 弊屣萬鍾
은거하는 집이 쓸쓸하였어라 / 蕭然衡泌
그러나 시국이 또 크게 어긋나 / 事又大謬
인륜이 무너지는 변고가 생기니 / 天紀淪夷
공은 비록 은둔하여 있었지만 / 公雖遯荒
국가를 위해 한숨을 내쉬었지 / 爲國喑噫
이에 진언한 바가 우뚝하여 / 其言卓卓
만세의 법도를 높이 세우니 / 立萬歲極
흉포한 자들이 마구 무함하여 / 羣兇鼓吻
공을 북방으로 귀양 보내었지 / 纍公于北
외진 골짜기에 물결이 달리는 듯 / 窮谷奔波
사람들 앞다투어 공을 영접하니 / 爭先迎見
미천한 하인들이 무엇을 알랴마는 / 走卒何知
공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어라 / 願識公面
공은 적소에서 편안히 지내며 / 公安于謫
세상을 하찮은 것으로 보았지 / 視世粃糠
하늘나라에 인재가 없어서 / 鈞天無人
상제가 무양을 보내시니 / 帝遣巫陽
공은 훨훨 날아 떠나가신 것이 / 公去翩然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듯했지 / 若有所期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니 / 騎龍上天
누가 공을 붙잡아 둘 수 있으랴 / 誰得以羈

세상에 오신 것은 시운이었고 / 適來時也
세상을 떠난 것은 하늘의 뜻이니 / 適去天也
세상에서의 영욕 따위야 / 世之榮辱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 公何與焉
오직 공이 세운 정기만이 / 維玆正氣
해와 별처럼 높이 빛나 / 日揭星明
천추에 길이 어둡지 않으니 / 不昧千秋
늠름한 기상 여전히 살아 계시도다 / 凜凜猶生
 
[주-D001] 평번(平反) : 옥사(獄事)에서 원통하고 억울한 사안(事案)을 바로잡는 것이다.
[주-D002] 중획(重獲) :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봉씨(逢氏)가 패전하여 두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두 아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레에서 내리자, 봉씨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 아래에서 너희들의 시체를 거듭 찾으리라.〔重獲在木下〕” 하였다. 그다음 날 가서 보니 과연 두 아들이 그 나무 아래에 죽어 있었다. 《春秋左氏傳 成公12年》 여기서는 기필코 전사(戰死)할 것임을 뜻한다.
[주-D003] 석 상서(石尙書) : 당시의 병부 상서(兵部尙書)인 석성(石星)을 가리킨다.
[주-D004] 황지(潢池) : 반란군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공수(龔遂)를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임명하며 말하기를 “발해에 난리가 일어나 짐이 몹시 근심하고 있다. 그대는 어떻게 도적을 진압하여 짐의 뜻에 부응하겠는가?” 하니, 공수가 “발해는 멀고 외진 지역이라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구휼하지 않기 때문에 적자(赤子)인 백성들이 황지(潢池)에서 폐하의 병력을 가지고 논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주-D005] 과도(科道) : 과도관(科道官)의 준말로, 명(明)ㆍ청(淸) 때 급사중(給事中)과 각 도의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통칭한 것이다.
[주-D006]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선조(宣祖)의 사친(私親)으로, 이름은 초(岧)이다.
[주-D007] 내란(內亂)은 간여하지 않는다 :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내란은 간여하지 않고, 외환은 피하지 않는다.〔內亂不與 外患不辟〕” 하였다. 이는 경대부(卿大夫)의 도리를 말한 것으로, 나라 안에서 동료(同僚)가 난리를 일으키려 할 경우에 자신이 토죄(討罪)할 능력이 없으면 간여하지 않을 뿐이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주-D008] 요순(堯舜)의 …… 않는다 : 맹자가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왕 앞에 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제(齊)나라 사람 중에서 나보다 왕을 공경하는 자가 없다.”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D009] 우물을 …… 하는 : 만장(萬章)이 “순(舜)의 부모가 순으로 하여금 곳집을 수리하게 하고 순이 곳집의 지붕에 올라가자 사다리를 치운 다음 고수(瞽瞍)가 곳집에 불을 질렀고, 순에게 우물을 치게 한 다음 순이 우물에서 나오기 전에 흙으로 우물을 덮었다.” 하였다. 고수는 순의 아버지이다. 《孟子 萬章上》
[주-D010] 우순은 …… 뿐 : 만장이 묻기를 “순(舜)이 밭에 가서 하늘을 부르며 우셨으니, 어찌하여 부르짖으며 우신 것입니까?” 하니, 맹자가 “원모(怨慕)하신 것이다.” 하였다. 집주(集註)에 “원모는 자기가 어버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함을 원망하여 사모하는 것이다.” 하였다. 《孟子 萬章上》
[주-D011] 급(伋)의 …… 것이니 : 아버지의 처가 되면 그 자식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비록 생모가 아닐지라도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급(伋)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이름이고 백(白)은 자사의 아들이다. 백이 쫓겨난 어머니〔出母〕가 죽었을 때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것에 대해 자사가 “급(伋)의 처가 되는 사람이 바로 백(白)의 어머니인 것이요, 급의 처가 되지 않은 사람은 백의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은 원래 쫓겨난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가 아니므로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禮記 檀弓上》
[주-D012] 기상(旂常) : 기(旂)와 상(常) 모두 왕후(王侯)를 상징하는 깃발로, 국가의 큰 공로를 이 깃발에 기록하였다. 명(明)나라 장거정(張居正)의 〈답응천순무손소계(答應天巡撫孫小溪)〉에 “선조(先朝)의 명신(名臣)으로서 기상에 공적이 새겨지고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긴 자는 공무를 봉행하고 법을 지키고 자기 몸가짐을 결백하게 가지고 백성을 사랑했을 뿐이다.” 하였다.
[주-D013] 짧은 율시(律詩) 한 수 : 《국역 월사집》 제14권에 〈백사 이 상공께 드리다.〉라는 제하(題下)에 “정사년 겨울에 흉악한 무리가 박몽준(朴夢俊) 등을 사주하여 연이어 소장을 올려 모후(母后)를 폐위할 것을 청하였다. 동짓달 20일 후 소장이 하달되어 정부(政府)가 수의(收議)하려 하자 백관들이 정청(庭請)하라고 협박하였는데, 나는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병으로 휴가를 내고 있었다. 이때 백사 이 상공은 재상에서 체직되어 교외의 독촌(禿村)에 우거하고 있기에, 내가 맏아들 명한(明漢)을 데리고 술을 가지고 가서 방문하고는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이어 결별(訣別)하였다. 이별하면서 입으로 한 수 읊어서 드렸다.”라는 서문이 붙어 있고, 이어 “백발의 몸으로 다시 만나니, 여생은 모두 성은으로 얻은 것. 우리들 앞엔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세상사는 말하고 싶지 않구려. 물이 드넓으니 교룡이 숨고, 겨울이 따스해 기러기 놀란다.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白髮重相見 餘生各聖恩 吾儕唯有死 世事欲無言 水濶蛟龍蟄 冬暄鴈鶩喧 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시가 있다. 목릉촌(穆陵村)은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이 있는 마을이다.
[주-D014] 험난한 …… 않았나니 : 소인이 득세하여 위태로운 시국에서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는 뜻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 종일을 기다리지 않는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하였다.
[주-D015] 상제가 무양(巫陽)을 보내시니 : 하늘에서 뛰어난 인재를 데려갔다는 뜻이다. 무양은 신무(神巫)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하늘나라에 인재가 없어 상제가 슬퍼하여 노래하는 무양을 내려보내 공을 불렀네.〔鈞天無人帝悲傷 謳吟下招遣巫陽〕” 하였다.
[주-D016] 용을 …… 올라가시니 : 소식의 〈조주한문공묘비〉에 “공은 옛날에 용을 타고 백운향에서 노닐며 손으로 은하수를 찢어서 하늘의 문장 나누었지.〔公昔騎龍白雲鄕 手抉雲漢分天章〕” 하였다.
 
출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82A_0500_010_0010_2012_007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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