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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문고 (漢陰文稿)/비, 행장, 제문 등

영의정 한음 이공 신도비명 병서

by Hhgj 2020. 1. 8.

영의정 한음 이공 신도비명 병서
領議政 漢陰 李公 神道碑銘 幷序

 

이조판서겸 대제학 용주(龍洲) 조경(趙絅) 찬

고(故)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사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經筵事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ㆍ세자사(世子師) 한음(漢陰) 이공(李公)의 묘소(墓所)는 양근(楊根, 양평(楊平))의 용진(龍津) 강가에 있다.

 

한양(漢陽) 조경(趙絅)이 그 묘비(墓碑)에 새긴 데 이르기를, 지난날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은 왜란(倭亂)을 평정하고 서울로 환도(還都)하여 중흥(中興)의 대업을 회복하였는데, 뭇 사람들이 칭송하는 말을 들으니 모두들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세 분의 정승(政丞)이 좌우에서 돕고 인도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세 분의 정승이란 곧 이 완평(李完平), 이원익(李元翼))과 이 오성(李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공이다. 공은 세 분의 정승 가운데 가장 연소(年少)하였지만 재능이 제일 뛰어났으며, 덕을 같이한 이와 협심해서 위아래가 함께 하여 오직 나라만을 위하고 일신(一身)을 바친 분 중에 공이 실은 제일이었다.

 

공의 휘(諱)는 덕형(德馨), 자(字)는 명보(明甫)인데 한산(漢山)의 북편에 살았다고 하여 ‘한음(漢陰)’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그 선조는 광주(廣州) 사람으로, 이집(李集)이라는 분이 문행(文行)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공민왕(恭愍王) 때를 당하여 적승(賊僧) 신돈(辛旽)이 시기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 아버지 이당(李唐)을 업고 영천(永川)에 도망하여 숨어 지내다가 신돈이 처형되자 벼슬길에 나아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니 사적(事蹟)이 수록되어 있다. 정 포은(鄭圃隱)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상을 떠나기에 미쳐 포은이 애도의 뜻을 표한 곡 둔촌(哭遁村), 이집(李集)의 호(號))의 시(詩)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朝鮮)에 와서 이인손(李仁孫)ㆍ이극균(李克均) 부자(父子)가 정승을 지내 이씨(李氏)가 드디어 크게 드러났는데, 그 후 이극균이 연산조(燕山朝)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화(禍)를 입었으니, 공에게 5대 조가 된다. 이세준(李世俊)은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고조(高祖)가 되고, 이수충(李守忠)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였는데 증조(曾祖)가 되고, 이진경(李振慶)은 몹시 현명(賢明)했으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으며, 이상(貳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추증하였는데 조고(祖考)가 된다. 고(考) 이민성(李民聖)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현령(縣令)을 지낸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醇厚)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어 장난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8세에 입학하여서는 어렵고 의심스러운 점을 지껄이는 짓이 어린이가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15세가 되기도 전에 뛰어나게 성취하였는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을 따라 산수(山水)간에 노닐면서 시(詩)를 창화(唱和)하는 것이 갈수록 아름다운지라 봉래가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다.” 하였고, 공이 읊은 ‘녹음백연기(綠陰白烟起)’ 등 네 구절의 시를 금수(錦水)의 계석(溪石)에 새겼는데,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20세에 과거(科擧)에 응해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정원(承政院))을 거쳐 사원(史苑,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에 천거를 받았으나, 당시 외구(外舅)인 아계공(鵝溪公, 이산해(李山海))이 궁중 소장의 서적을 주관할 때라 공은 사사로운 친분을 혐의롭게 여겨 응강(應講)을 하지 않았는데, 선조(宣祖)가 ≪강목(綱目,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講)하려고 하면서 고문(顧門)에 대비할 재신(才臣) 다섯 사람을 선발케 하고 어부(御符)의 책을 내어주자 공이 참여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겼다.

 

임인년(壬寅年, 1582년 선조 15년)에 조사(詔使)로 온 왕경민(王敬民)이 와서 한강(漢江)에 유람하다가 이르기를, “본국(本國)에 이모(李某)란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만나볼 수 있는가?” 하였으나 공이 외신(外臣)은 사사로운 교제가 없다고 사양하자, 왕공(王公)은 한 수(首)의 시(詩)를 기증하고 사연을 곁들여 이르기를, “그대의 풍도(風度)가 몹시 출중하다 들었소. 내 비록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이를 보내며 신교(神交)를 맺고자 하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되었고, 또 독서당(讀書堂)의 사가(賜暇)에 참여되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같이 청선(淸選)의 부러운 자리에 올랐다. 이때 율곡(栗谷)이 문형(文衡)을 맡고서 이 선발을 주장하였는데 어떤 재상(宰相)이 밤을 이용하여 율곡의 처소로 와서 이르기를, “양이(兩李)는 과연 인망(人望)은 있으나, 공이 만일 그들의 의향을 알지 못하고 천거한다면 시사(時事)를 그르칠까 걱정입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사람을 천거함은 인재(人材)를 얻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오. 어찌 의향을 가지고 논하리요?” 하니, 그 사람은 오래도록 다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이듬해에 임금이 서총대(瑞葱臺)에 친림(親臨)하여 무예를 시험할 때 공이 응제(應製)하여 장원(壯元)했는데, 이로부터 무예를 겨룰 적마다 항시 수위(首位)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다분히 남의 윗자리를 바라지 않음이 공의 본 뜻이었다. 일찍이 정시(庭試)에서 동진자(同進者)가 질투하는 말을 하자 공이 드디어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니, 듣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어 부수찬(副修撰)에 올랐고 정언(正言)ㆍ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일본(日本)의 사신(使臣)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가 왔을 적에 공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서 선위(宣慰)의 책임을 맡았다. 두 왜사(倭使)는 공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서울로 들어와서는 향연(享燕)을 베푼 자리에서 현소 등이 보빙(報聘)을 몹시 간청하므로 공은 얼굴에 엄정한 빛을 띠고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의 수교(修交)에는 신의(信義)를 버리고는 할 수가 없다. 지난날 네 나라의 봉강신(封疆臣)이 우리나라의 망로(亡虜) 사화동(沙火同)을 부추겨 끼고서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는데도 너의 나라에서는 금할 줄을 모르니, 신의라는 게 어디서 있는가?”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현소와 평의지는 졸왜(卒倭)를 우리나라로 보내어 한 달이 못 되어 사화동과 사로잡혀 간 늙은이와 아이들 백여 명을 데리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下賜)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고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 부제학(副提學)ㆍ대사간(大司諫)ㆍ국자전의(國子銓議, 대사성(大司成)의 이칭)를 역임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초배(超拜)되어 대제학(大提學)을 겸하니 당시 나이 31세였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이후 문형(文衡)을 맡았던 사람은 모두 오래도록 덕망을 쌓고 품계가 높은 이들을 등용하였고 공과 같은 묘령(妙齡)에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문학에도 능숙하고 덕망을 쌓은 훌륭한 이가 몇 사람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공이 문형을 맡은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자 모두가 이르기를, “이모(李某)보다 앞설 사람은 없다.”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들어 왜구(倭寇)들이 대거 침입하여 우리나라를 천식(荐食, 점차로 먹어 들어감)하면서 이모(李某)를 만나 강화를 논의하겠노라 선언하므로, 선조가 조신(朝臣)들에게 그 대책을 두루 하문(下問)하였으나, 모두가 겁에만 질려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급히 서두르는 것이 신(臣)의 직분입니다.”라고 자청하여 단기(單騎)로 급히 달려 구성(駒城, 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벌써 적(賊)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널리 퍼져 있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곧바로 되돌아 한강(漢江)을 건너와 보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행(西幸)한 뒤라 사잇길로 뒤쫓아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적들은 패수(浿水, 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까지 핍박해 들어와서 공을 만나기를 청하므로, 공은 또 가길 자청하여 단가(單舸)로 강중(江中)에까지 나아가 그들을 회견하였다. 뭇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질려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건만, 공은 적을 만나 태연자약한 기세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오랫동안의 우호(友好)를 깨뜨림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현소 등이 이르기를, “우리는 명(明)나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 군도(軍途)를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는지라, 공은 준엄한 얼굴을 지으며 잘라 이르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부모국(父母國)과 같은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설사 우리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 어찌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겠는가?” 하였다.

 

그 후에 현소 등은 떠들썩하게 공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험악한 적진 속에서도 말하는 품이 지난날 연회의 주석(酒席)에서 하는 태도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미치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였다. 공은 밤중에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장전(帳殿, 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며 놓은 자리)에 배알(拜謁)하고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성(鰲城)과 합력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는 일을 아뢰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난색을 보였는데, 공이 극력 항언(抗言)하여 마침내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대가(大駕)가 정주(定州)에 도착하고서야 길을 떠나게 되었다.

 

공이 출발에 앞서 오성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공이 남긴 말은 옛날 신서1)(申胥)가 “내 반드시 초(楚)나라를 중흥하리라.”고 한 것과 같은지라, 사람들은 모두 공이 반드시 성공을 거두리라고 믿었다. 마침내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옮기지 않고 우뚝 서서 피눈물을 흘리며 순안사(巡按使)에게 연달아 여섯 차례나 글을 올리자, 순안사 학걸(郝杰)이 공이 힘을 다하며 지쳐 쓰러지면서도 충심(衷心)을 드러내는 데 감탄하여 조정에 상주(上奏)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주장대로 조승훈(祖承訓) 등 세 장수를 보내어 먼저 왜적(倭賊)을 시험해 싸우다가 약간의 패배를 당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가 크게 노하여 대군(大軍)을 출동하게 하면서 이여송(李如松)으로 대도독(大都督)을 삼으매 여러 장수들이 넘치는 용맹으로 다투어 권하여 한바탕의 싸움으로 환도(丸都, 고구려의 옛 도성)의 적둔(賊屯, 적진(賊陣))을 격멸하였으므로, 이에 우리나라 사람이 위태로움에서 벗어나 비로소 회복할 가망이 있었다.

 

이듬해에 공이 대사헌으로서 도독(都督)을 접빈(接儐)하여 한편으론 군막(軍幕)의 계책에 참여하고 또 한편으론 군량(軍糧)의 공급을 주관하니 비록 도독의 존엄으로서도 일의 중요한 대목을 당해서는 반드시 공의 단안(斷案)을 묻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산과 들에는 치열한 싸움으로 피가 흐르고 도시와 여항(閭巷)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공은 오로지 충(忠)과 의(義)로써 상처 입은 백성들의 마음을 격려해가며 군량을 운송하여 한번도 공급을 떨어뜨린 적이 없었으므로 병마(兵馬)는 이 때문에 배부르고 살쪘으며, 마침내는 명군(明軍)으로 하여금 선후(先後)하며 삼경(三京, 평양(平壤)ㆍ개성(開城)ㆍ한성(漢城))을 손쉽게 회복할 수 있었으니, 그 공훈(功勳)을 논한다면 누구와 고하(高下)를 따지리요?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형조 판서의 직질을 더하였다.

 

4월에 들어 공은 명군(明軍)을 인도하여 한양(漢陽)에 입성(入城)해서 묘사(廟社)의 회신(灰燼)을 말끔히 쓸고 크게 통곡하니 살아남은 고로(故老)들이 모두가 울면서 공을 보기를 부모(父母)와 같이 여겼다. 경성(京城)은 이제 막 병화(兵禍)에 결딴이 난 뒤라 굶주린 데다 돌림병마저 치열하게 번져 부자(父子)가 뼈를 바꾸어 씹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이 고난(苦難) 속에 슬피 울부짖었고, 이미 굶어 죽은 시체가 길가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쉴 새 없이 굶주린 백성들을 거두어 먹이니 예상(翳桑)의 진활2)(賑活) 같은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고, 또 한편으론 흩어진 서적(書籍)들을 수집하여 강유(講帷, 강연(講筵))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오성(鰲城)을 대신하여 병조 판서를 제수받고서 서애(西厓) 유상(柳相)과 함께 도성(都城) 안의 백성들을 안무(按撫)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모상(母喪)을 당하였는데, 임금이 ‘국사(國事)가 한창 어려운 때이니, 이모(李某)는 나라의 기둥으로서 단 하루도 없어서는 아니 된다’고까지 하면서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있는 이를 출사(出仕)케 하는 일)을 명하므로, 공이 아홉 차례나 사면(辭免)을 비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준엄한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나는 적(賊)이 물러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경(卿)이 나오지 않는 것을 가지고 걱정한다.” 하니, 공은 부득이 울음을 머금고 조정(朝廷)에 나아가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하므로 시무 팔조(時務八條)를 진달하였는데, 내용이 선명하고 조리가 있어, 단서에 적합한 것이 마치 유부(兪跗,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와 편작(扁鵲, 주(周)나라 때 명의(名醫))의 용약법(用藥法)과도 같아 모두가 기사 회생(起死回生)을 시킬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과 장정(壯丁)을 모선(募選)하여 금군(禁軍)에 충당할 것들로서, 이름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라 했는데, 대저 병기(兵器)인 과(戈)ㆍ순(楯)ㆍ포(砲)ㆍ피(鈹) 등의 제조법은 모두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저서(著書)를 모방한 것이었다. 또 널리 안팎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국용(國用)을 넉넉히 하고 군량(軍糧)을 족하게 한다 했으니, 조 영평3)(趙營平)의 계책도 이보다 나을게 없었으므로,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말하길, “국가를 중흥하게 할 근본이 실로 이 거조(擧條, 임금에게 아뢰는 조항(條項))에 있다.” 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전임하였다. 이듬해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호서(湖西)의 역적(逆賊)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두 고을을 함락하자 홍주 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이 그를 토멸하여 주살하였는데, 그 잔당(殘黨)이 체포당하기에 미쳐 공의 이름을 무인(誣引)하여 마치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의 변란(變亂, 이홍윤(李洪胤)의 모반) 때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이 역적들의 입에 오르내림과 같았으므로, 공은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의 명을 기다렸으나 임금은 수차(數次) 온유(溫諭)를 내리고 국청(鞫廳)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공은 열 차례나 사면의 글을 올려 간곡히 청원하자 그제야 병조 판서의 자리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적(倭賊)이 재침(再侵)하자 명(明)나라 황제가 네 사람의 장수(將帥)를 보내면서 병사(兵士) 10만 명을 인솔하게 했고, 어사(御使) 양호(楊鎬)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양공(楊公)은 연소(年少)한 데다 기세를 마구 부려 세상의 명사(名士)들을 얕보는 버릇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평판을 듣고 몹시 겁을 먹었는데, 임금은 많은 신하들 가운데 오직 공만이 이 제독(李提督)의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상하(上下)의 인심을 얻은 적이 있음을 살피고 공에게 그의 접빈(接儐)을 명하였다. 양공은 단 한 차례의 상면(相面)으로 공에게 감복하므로 공이 이에 말하기를, “지금 왜적(倭賊)의 기세가 몹시 험악하니 순식간에 한강(漢江)을 건너올 것이다. 까딱 한 번 천참(天塹, 천연의 요새지(要塞地) 한강(漢江)을 가리킴)을 잃는다면 비록 명군(明軍)같은 위세(威勢)일지라도 힘이 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양공(楊公)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서울로 들어가 서둘러 책전(責戰)을 하고 유격장(遊擊將) 마귀(麻貴)가 거느린 용감한 기병들이 왜적을 직산(稷山)의 소사(素沙) 들판에서 크게 무찔렀다. 서울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됨은 공의 공력(功力)이 많았다 하겠다.

 

양공(楊公)은 승전(勝戰)의 기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울산(蔚山)에서 포위하고, 그 외진(外陣)을 공격하여 적의 무리를 많이 무찌르자, 가등청정은 토굴(土窟) 속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기가 죽어 있었는데, 때마침 날씨가 큰비와 눈이 내리고 군마(軍馬)가 주리어 다리를 떨고 있으므로 명군(明軍)은 할 수 없이 좌차(左次, 산의 좌측에 숙영(宿營)함)를 하고 있었다. 공은 비록 그러한 위급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그 기상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양공이 몹시 거룩하게 여기면서, “이모(李某)는 비록 명(明)나라 조정(朝廷)에 있다하더라도 예복(禮服)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어 묘당(廟堂)에 서서 백료(百僚)들을 복종하게 할 인물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우상(右相)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는데, 얼마 안 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하할 때 선조(宣祖)가 전송(餞送)을 하니 유정이 간절한 말로 이르기를, “이 나라에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가장 훌륭한 자와 함께 동행하게 한다면 만족히 여기겠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에게, “의중(意中)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문(下問)하므로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李某)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공을 종행(從行)하게 명하자, 유정은 몹시 기뻐하면서, “나는 성공을 하였다.” 하였다. 순천(順天)에 당도하니 궁지에 몰린 적추(賊酋)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기세가 몹시 꺾여 섬멸(殲滅)의 날을 기필(期必)할 수 있었는데, 유정은 교활한 성품에다 남에게 분공(分功)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몰래 소서행장에게 사람을 보내 피하여 달아날 것을 권유하였다. 공이 그 내용을 미리 탐지하고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으로 하여금 명(明)나라 수군(水軍) 제독(提督) 진린(陳璘)과 약속을 하고 요항(要港)에 잠복했다가 퇴각하는 적을 대파(大破)하게 하니, 소서행장은 겨우 죽음만을 면하고 도망하였다. 유정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개하면서, “이모(李某)가 나의 30년의 훈명(勳名)을 떨어뜨린단 말인가?” 하고 아쉬워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홍여순(洪汝諄)이 공을 해치려고 유정과의 관계를 적발하여 무함(誣陷)하니, 공이 열 차례나 해직(解職)을 바라는 글을 올렸다. 임금은 그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경(卿)의 심사(心事)는 청천(靑天)의 백일(白日)과도 같다. 미친 바람 거센 비가 몰아친다 해도 그 체모(體貌) 자약(自若)하니, 경은 마음속으로 반성을 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인데, 유씨(劉氏) 그 사람이 어찌 해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은 오히려 불안하게 여겨, 여러 차례 호소한 끝에 상직(相職)에서 물러나 판중추(判中樞)를 제수받았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임무를 띠고 남변(南邊)에 나아가 군정(軍政)을 바로잡고 민폐(民弊)를 파헤쳐 호령(湖嶺,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방을 안정케 하였다. 특히 공은 적을 살피는 데 뛰어나서 적의 진위(眞僞)를 손꼽듯이 정확하게 알았는데, 왜사(倭使) 귤지정(橘智正)이 문서(文書)를 가지고 와서, 허세를 부려 공갈하며 화친을 요구하자, 공은 ‘이것이 대마도(對馬島)의 속임수이지 일본(日本)의 행위가 아니라’고 여겨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귤지정에게 이르기를, “명조(明朝)에서는 너희 왜국(倭國)이 침략을 반복한 때문으로 본국(本國)에 군사(軍士)를 남겨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이러한 때에 거짓말을 해가며 우리를 속이려하는가?” 하고 이어서 남쪽 지역에 남아 돌아가지 않은 명병(明兵)을 모아 대오(隊伍)를 정돈하는 한편 급히 형개(邢玠)의 군문(軍門)에 통고해서 왜적들에게 고시(告示)할 유첩(諭帖)을 만들어 부영(釜營, 부산진(釜山鎭))에 널리 내걸게 하니, 적이 입을 다물고 물러갔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조정에 들어와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듬해인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한 이변(異變)이 일어나자, 임금이 2품 이상의 조신(朝臣)들에게 그에 대한 소회(所懷)를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진언(進言)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체직당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선무(宣武)ㆍ호성(扈聖) 등의 책훈(策勳)에 앞서 선조(宣祖)가 하교(下敎)하기를, “이모(李某)는 왜구(倭寇)들이 충척(充斥)했던 날 단기(單騎)로 나아가 적(賊)의 우두머리를 만났으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이 아니라면 나아갈 수가 없다.” 하면서 재촉하여 녹훈(錄勳)을 명하였는데, 공이 여덟 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려 사양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훈을 교감정(校勘定)하기에 미쳐 당시의 재상(宰相) 유영경(柳永慶)이 책훈을 꺼려한 나머지 도리어 공이 올린 차자를 지적하여, “이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이다. 한노(漢老, 한음(漢陰)을 지칭함)의 사훈(辭勳)은 당연한 처사이다.” 하고서, 끝내 기록에서 빼버리니 이 때문에 여론이 분분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선조(宣祖)가 승하(昇遐)하여 재궁(梓宮)이 아직 빈전(殯殿)에 있었는데, 임해군(臨海君)에 대한 고변(告變)이 있어 삼사(三司)에서 즉시 법대로 다스리길 청하자, 광해군(光海君)이 대신(大臣)들의 논의를 물었으므로 공과 좌상(左相) 이항복(李恒福)은 의(義)로써 처단하는 것보다는 은정(恩情)으로 감싸줄 것을 말하였고, 한강(寒岡) 정구(鄭逑)도 도헌(都憲)으로써 상소(上疏)하여 전은(全恩)을 주장했으며,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도 차자를 올려 역시 전은을 주장하자 시론(時論)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전은을 주장한 사람들을 지목하여 호역(護逆)이라 몰아세웠으니, 척포(尺布)의 요가4)(謠歌)에 대해 문제(文帝)가 종신토록 괴로워했던 일을 몰랐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명조(明朝)에서 적장자(嫡長子)를 버려 두고 서자(庶子)를 세웠다는 이유로 광해군(光海君)의 책봉(冊封)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연경(燕京)에 도착하자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을 보내 임해군(臨海君)의 광포(狂暴)한 병 상황을 사문(査問)하자, 온 조정(朝廷)이 허둥지둥 놀라 입을 다물 뿐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있으므로 공이 달려 나아가 이르기를, “아우의 일로 형을 사증(査證)하는 행위는 아무리 하국(下國)일지라도 명을 받을 수 없다.” 하니, 차관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는 사문하지 아니하였다.

 

추측컨대 만력(萬曆) 말엽에 천자(天子)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옹립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아 아무리 번국(藩國)에서 자국(自國)의 세자 책봉의 허락을 요청하여도 명조(明朝)에서는 그 허락을 자꾸만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공을 명하여 진주사(陳奏使)로 삼으니, 공은 밤낮 없이 길을 재촉하여 27일만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백방(百方)으로 주선하여 책봉의 허락을 받아 돌아오자, 광해군이 몹시 기뻐하여 공의 아버지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고 그 아들에게는 6품(品) 벼슬을 내렸으며,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내려 갑절 돈독히 대우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 봄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었으며,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ㆍ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분 선생을 터무니없이 헐뜯자, 공은 세 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려 정인홍의 망동(妄動)을 신랄하게 배척하였으며,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 봄에 해서(海西)의 옥사(獄事,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의 무고사건)가 일어났고 이듬해인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박응서(朴應犀)의 고변(告變,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고발함) 사건이 일어났다. 한 사람을 조사하면 열 사람이나 끌어들여 함부로 무인(誣引, 무고(無辜)한 사람을 거짓죄에 끌어들임)을 해서 불길이 궁내(宮內)에까지 퍼지게 되어 임자년의 사건에 비해 더욱 참혹하였다. 아첨을 일삼는 신하들이 먼저 광해군의 마음을 틀어잡았고, 광해군은 친국(親鞫)을 한답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범인의 죄상을 살피니 입시(入侍)한 모든 신하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공은 오직 정의(正義)만을 지켜 아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번(平反)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대부분 풀려나게 하였다.

 

이때 군소배(群小輩)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화본(禍本)이라 지목하고서 겨우 여덟 살에 불과한 대군(大君)을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목매달아 죽일 것을 청원케 했고, 또 대신(大臣)들을 구사(驅使)하여 정청(庭請)을 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대사헌(大司憲) 송순(宋諄)과 대사간(大司諫) 이충(李冲)은 전상(殿上)에서 양언(揚言)하기를, “조정(朝廷)의 여론이 모두 대신(大臣, 영상(領相)을 가리키는 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합문(閤門) 앞에 부복(俯伏)하여 영창(永昌)의 안율(按律)을 청하지 아니함을 가지고 잘못이라 한다.” 하였고, 바로 이어서 이이첨(李爾瞻)이 직접 나서 대신을 겁주며 말하기를, “조정의 공의(公議)가 모두 영창을 처형코자 하는데, 유독 대신만이 출치(出置)할 것을 청하고 있으니, 우리들의 종사(宗社)를 위한 뜻과는 거리가 멀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웃으며 동요됨이 없이 장계(狀啓)를 초(草)하여 전의(前議, 출치(出置)에만 그치자는 논의(論議))를 고집할 뿐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니, 이이첨의 무리들이 몹시 분격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당초 공과 오성(鰲城)이 이 일을 가지고 논의할 적에 오성이 이르기를, “만약 영창(永昌)을 도성(都城) 밖에다 출치(出置)하는 데만 그친다면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다툴 이유는 없다. 그러니 공은 뜻을 굽혀 따르라.” 하였다. 그러나 영창의 출치를 청한 것 역시 공의 본 뜻은 아니었다.

 

영창(永昌)이 이미 출치되고 나자, ‘개가 겨를 핥다가 반드시 쌀에까지 미치려 한다는’ 격(格)으로 대관(臺官) 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정호관(丁好寬) 등이 한통속이 되어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고 나서므로 공이 오성(鰲城)에게 이르기를, “살아서 고작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 일각(一刻)인들 참을 수가 있겠는가? 내 마음이 타는 것만 같네. 오늘 바로 그대와 같이 차자(箚子)를 올려 먼저 정성과 효도를 다하여 자전(慈殿, 인목 대비(仁穆大妃))에게 위안을 드릴 것을 누누이 개진(開陳)하고 이어서 군소배들의 무천 부도(無天不道)한 행위를 간절히 탄핵하며 고두 유혈(叩頭流血)토록 간(諫)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리게 한다면 아마도 나의 책임은 면할게 아니겠는가?” 하니, 오성이 이르기를, “불가하다. 우리들이 계사(啓辭)를 절반도 아뢰기 전에 임금이 몹시 진노할 것이고, 대간(臺諫)이 그 틈을 타서 날쌔게 공격해 온다면 우리들이 하고자한 말을 어떻게 마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몹시 중대한 문제이므로 필경 대신(大臣)에게 자문을 구할 것이니, 우리들은 조급히 서두르지 말고 온갖 정성을 다해 헌의(獻議)하는 가운데 깊이 궁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여, 공도 그렇겠다고 동의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오성이 먼저 참소를 당하고 물러가니 공 혼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무함(誣陷)을 입어 사사(賜死)되고 깊숙이 들어앉은 자전(慈殿)도 박해를 당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정관(廷官)들은 연흥(延興, 김제남(金悌男)의 봉호(封號))의 부음(訃音)을 자전에 고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한창 논의하고 있었다. 공은 ≪춘추경(春秋經)≫의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여길 수 없고, 어머니와 절륜(絶倫)할 수도 없다.’는 등의 구절을 인용하여 입의(立議)하니 상하(上下)의 군소배들이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은 이성(李惺)ㆍ박정길(朴鼎吉) 등을 끌어들여 조세(助勢)를 삼고서 험악한 기세로, “역당(逆黨, 역도(逆徒))은 바로 이모(李某)다.”라고 했고, 삼사(三司)에서도 모두 들고일어나 법으로 다스리기를 주청하고 나선 지 월여(月餘)가 지났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허락하지 않고서 다만 관직의 삭탈만을 명하였다.

 

공은 용진(龍津)으로 퇴귀(退歸)하여 국사(國事)를 염려하고 탄식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음식을 물리쳐 먹지 않고 밤이면 잠자지 못하다가 끝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그날이 바로 10월 9일이요, 누린 춘추(春秋) 53세였다.

 

부음(訃音)을 전해 듣고 광해군은 몹시 애도하며 복관(復官)을 명했으며, 위로는 어진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이서(吏胥)와 군려(軍旅)ㆍ시정(市井)의 소민(小民)들까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앞으로 어찌해야 할꼬?” 하면서, 더러는 철시(撤市)를 하고서 망곡(望哭)을 하고, 더러는 서로들 재화(財貨)를 염출하여 적의(吊意)를 표하느라 문전(門前)에 줄을 이었다. 이때의 광경이 마치 송(宋)나라 때 경수(京帥)의 백성들이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죽음을 애도함과 같았다고 하니, 도대체 공은 어떻게 해서 이다지도 남에게 마음을 얻었단 말인가? 공의 순일(純一)한 충성과 덕(德)이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병인(兵刃)으로도 끝내 제지할 수 없었고, 또 이 백성들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올바른 도리를 행하는 백성들이라 공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사양치 않으려고 하는 터인데, 어찌 수사(收司)의 율법 같은 것을 염려했으리요?

 

공은 29년 동안을 한결같이 선조(宣祖)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시(詩)와 서(書)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 문치(文治)를 장식하자 세상 사람 모두가 감히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대란(大亂)이 홍수가 하늘을 뒤덮듯이 일어나 2백년 동안 평화만을 누렸던 종사(宗社)와 생영(生靈)이 사나운 경악(鯨鰐)의 부리 앞에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공은 외로운 몸으로 거듭 발이 부르트도록 왕명(王命)에 분주하여 상하(上下, 임금과 백성)의 소급(所急)과 소망(所望)을 척수 촌설(隻手寸舌)을 휘둘러 모두 해결하였다. 이렇듯 이룬 공덕은 비록 옛 사람이라도 짝할 사람 없으련만 공은 오히려 겸퇴(謙退)하고 자처(自處)하지 아니하였으니, 군자들이 이 때문에 더욱 공을 칭미(稱美)하였다. 그리고 공은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부터 광해군을 섬겼는데, 이때에 천붕지통(天崩之慟, 선조(宣祖)의 승하(昇遐))을 당하여 우위(虞危)가 만단(萬端)인 가운데서도 공은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선후(先后, 선조(宣祖))와의 제우(際遇, 군신간(君臣間)의 뜻이 잘 맞는다는 말)를 미루어 새 임금에게 보효(報效)코자 했으니, 제갈 무후5)(諸葛武候)의 마음과도 같았으리라. 더구나 무신년의 신정차(新政箚)를 본다면 공은 참으로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말하겠다. 갖가지 수없이 많은 말 가운데 위로는 임해(臨海)에 대한 전은(全恩)과 천명(天命)의 두려움을 논하였고, 가운데는 모후(母后)에게 진효(盡孝)할 것을 논하였으며, 아래로는 저위(儲位, 세자(世子)를 말함)를 보도(輔導)할 것과 언로(言路)를 열고 충직(忠直)을 납수(納受)하고 궁금(宮禁, 궁성(宮城))안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원사(畹事, 농사 즉 민생 문제를 말함)를 걱정하고 ≪시(詩)≫ㆍ≪서(書)≫ㆍ≪역(易)≫ㆍ≪춘추(春秋)≫ 등의 글을 역람(歷覽)하여 전대(前代)를 지표로 감계(鑑戒)를 삼을 것까지 논급하였으니 말이다. 만일 광해군이 그 가운데서 열에 한두 가지라도 용심(用心)을 했더라면 어찌 여련왕6)(厲憐王) 같은 일이야 있었겠는가?

 

아! 슬프도다. 공은 오직 한 사람의 몸으로서 선조(宣祖)를 만나서는 모계(謀計)가 시행되고 공(功)도 뒤따라서 난국을 평정하고 나라를 편하게 하기를 판상 주환(板上走丸)과도 같이 했었는데, 광해군을 만나서는 그 임금에게 바르게 간(諫)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비방한다 말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가지고 알소(訐訴)라 하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부추기는 무리들이 문강(文岡, 법금(法禁)ㆍ문강(文綱)ㆍ법강(法綱))을 치켜들어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날뛰니, 공이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었겠는가? 천추(千秋)의 먼 훗날 선비들이 공의 남긴 글을 읽는다면 반드시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리라.

 

공이 별세한 얼마 뒤에 오상(鰲相 이항복)은 북청(北靑)으로 귀양 가고, 오상(梧相, 이원익(李元翼))은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다. 뭇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바 ‘이성(李姓)의 삼상(三相)이 죽지 않으면 귀양을 갔으니, 방국(邦國)이 어찌 병들고 시들어 끝내는 망하지 않고 배기겠는가?’이다.

 

공은 정신이 수랑(秀朗)하고 풍도가 응원(凝遠, 엄정(嚴正)하고 심오(深奧)한 모양)하여 약관(弱冠)이 되기도 전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가 공보(公輔)의 자질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동배간(同輩間)에 어울려 노닐 적에도 희노(喜怒)의 빛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며, 군종간(群從間)에 있어서도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호탄(嫮誕)을 억누르고 한차례도 입밖에 낸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향리(鄕里)의 친척 가운데 가난한 사람을 보게 되면 반드시 구제할 생각을 하더니, 귀(貴)하게 되어서는 내외(內外) 친척들 모두가 소원함이 없이 따르고 복종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유자(孺子)가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타고난 천성(天性)이다.

 

백사(白沙) 이상(李相 이항복)은 공과 막역한 친구로서 사생간(死生間)에 서로 막힘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함사 대영7)(含沙待影)했던 자들을 어찌 한정했으리오만, 백사(白沙)는 공의 묘지(墓誌)를 지을 적에 한 사건도 빠뜨리지 않고서 공의 윤자(胤子)에게 누설하지 말 것을 경계하며 공의 평생에 대해 단언하기를, “어진 사람을 추대하고 능(能)한 이에게 양보함은 자피(子皮, 춘추 시대 월(越)나라 범려(范蠡))와 같고, 빈객(賓客)을 응대하는 것은 숙향(叔向, 춘추 시대 진(晉)나라 양설힐(羊舌肹))과 같고, 알면 말하지 않음이 없음은 송경(宋璟, 당 예종(唐睿宗)때의 현상(賢相))과 같고, 선비를 높이고 착함을 좋아하기는 유정(留正, 송 광종(宋光宗) 때의 상신(相臣))과 같고, 사당(私黨)을 만들지 않기로는 사마광(司馬光, 송 신종(宋神宗)때의 명신(名臣))과 같다.” 하니, 세상 사람들이 사리(事理)에 합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공의 문장(文章)은 육경(六經)에서 나와 정주(程朱)의 글로 도움을 삼아서 사견의 단정(斷定)에는 ≪춘추(春秋)≫ 같은 성경(聖經)을 위주로 했고, 옛일을 고찰하는 역량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빌렸으며, 그 밖의 수많은 외가서(外家書)까지도 조예가 한계가 없이 매우 박식하였으므로 평소 술작(述作)을 하였는데도 즉각 수천(數千)의 말을 이루곤 하였다. 그러므로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ㆍ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사이에 명장(明將)과의 주고받은 행문(行文)과 이문(移文)이 한창 번다했을 때에도 좌수 우작(左酬右酢)한 공의 필적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운문(韻文)에 있어서도 풍류(風流)의 우아한 흥치(興致)가 그 인격에 어울린다 하겠다.

 

부인은 성(姓)이 이씨(李氏)인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딸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예로 유순하고 지조가 있어 구고(舅姑)를 섬기고, 부군(夫君)을 돕는데 예의와 공경을 다하다가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난리에 나이 28세로 절사(節死)하였는데, 정문(旌門)을 세워서 표창(表彰)하고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이 이여규(李如圭)는 통정 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둘째 이여벽(李如璧)은 현감(縣監)으로 조세(早世)하였고, 셋째 이여황(李如璜)은 가선 대부(嘉善大夫) 감사(監司)를 지냈으며, 딸은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난 세 아들은 이여박(李如璞)ㆍ이여방(李如)ㆍ이여선(李如璇)이요, 세 딸은 군수(郡守) 이증(李憕)과 의관(醫官) 허목(許楘)에게 출가하고 하나는 조과(早寡)하였다. 판결사에게 네 아들이 있으니, 금부도사(禁府都事)인 이상건(李象乾)과 이상곤(李象坤)ㆍ이상겸(李象謙)ㆍ이상정(李象鼎)이요, 판서(判書) 이기조(李基祚)ㆍ사인(士人) 최유석(崔有石)ㆍ홍휘(洪彙)ㆍ이구징(李龜徵)은 그 사위다. 그리고 둘째인 현감 이이벽은 아들이 없어 맏이 판결사의 넷째 아들 이상정이 뒤를 이었으며, 셋째인 감사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이상진(李象震)이요, 여섯 딸은 진사(進士) 오정규(吳挺奎), 참의(參議) 목행선(睦行善), 현감(縣監) 정담(鄭儋), 사인(士人) 조덕윤(趙德潤), 이현년(李玄年), 진사 서내익(徐來益)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사위 정기숭에게 네 아들이 있어 정진(鄭鉁)ㆍ정윤(鄭錀)ㆍ정민(鄭鈱)ㆍ정윤(鄭鈗)인데, 둘째인 정윤은 문과(文科)를 거쳐 부윤(府尹)에 올랐고, 사인(士人) 이명징(李明徵), 정자(正字) 한오상(韓五相) 등은 그 사위다. 그 밖에 많은 내외(內外) 손증(孫曾)은 이루 기재할 수가 없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11년째에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종사(宗社)를 바로잡자 공의 사자(嗣子) 이여규(李如圭)가 비로소 시장(謚狀)을 태학사(太學士) 정경세(鄭經世)공에게 청하여 태상시(太常寺)에 올려 입주(入奏)하자 문익(文翼)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그리고 40년이 지나서 공의 손자인 도사(都事) 이상정(李象鼎)이 오상(鰲相)이 지은 묘지(墓誌)와 우복당(愚伏堂, 정경세(鄭經世))이 지은 시장(謚狀)을 받들고 나를 청성산(靑城山)에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부(祖父)의 묘목(墓木)이 크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법도에 있어 마땅히 비문의 현각(顯刻)이 있어야할 터인데, 돌아보건대 제부(諸父)와 제형(諸兄)들은 수(壽)를 누리지 못했고 지금은 불초(不肖)만이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에 와서는 대부(大父, 조부(祖父)의 통칭(通稱))와 병세(幷世, 한 세상에 같이 살음)했던 분들마저 한 사람이라도 남아서 대부의 풍열(風烈, 풍채(風采)와 공적(功蹟))을 들려주는 이가 없고, 또 우러러보며 사모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듣건대 집사(執事)께서는 남의 선행(善行)을 말하기를 즐겨 현대부(賢大夫)들의 공덕을 기리는 명지(銘誌)를 많이 지었다고 하니 감히 선영(先靈)의 비명(碑銘)을 부탁드려 집사께 누를 끼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사양하기를, “선 상국(先相國)의 위대한 충훈(忠勳)은 사람들의 입이 모두 비석(碑石)일 뿐만 아니라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이미 대서(大書)로 특기(特記)했어도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는데, 어찌 노쇠하고 미련하여 천열(賤劣)하고 문현(聞見)없는 말이 필요하리요? 더구나 나는 시골의 만생(晩生)으로서 비록 일찍이 관직에 임명되어 요행히도 문임(文任, 대제학(大提學)을 말함)의 자리에 있었지만, 봉심 호목(蓬心蒿目)인 데다가 중막(重膜)이 가로막혀 짓는다는 것이 하찮은데, 어찌 감히 대군자(大君子)의 사적(事蹟)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의 부탁을 경솔히 할 수 없으니, 자네가 다시 생각해 보게나.” 하였는데, 도사공(都事公)은 읍(揖)하고 물러갔다 다시 오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는지라, 그 기색을 살피건대 졸문(拙文)을 얻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고, 또 생각건대 내가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과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간의 사태를 약간 이표8)(耳剽)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듯 했으며, 성품이 아첨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까지 강청(强請)을 하니 인정상 참으로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항복(李恒福)ㆍ정경세(鄭經世) 양공(兩公)의 소찬(所撰)을 바로잡고 또 조그마한 견문을 약간 보태어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선세(先世)에 둔촌옹(遁村翁)이 창시하여 효행(孝行)과 절의(節義)가 아울러 우뚝하였는데, 후손이 선대의 미덕(美德)을 계승하여 충희공(忠僖公), 이인손(李仁孫))과 이극균(李克均) 부자가 (모두 상신(相臣)되어) 천명(天命)을 보전하고 체백(體魄)을 훼상(毁傷)당하기도 했도다. 회수(淮水)의 흐름 길게 뻗쳐 끊이지 않고 산악(山嶽)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 공이 뒤를 이어 떨쳐 일어나니, 공의 기국(器局)이 컸으므로 7, 8세의 어릴 때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도다. 하늘과 사람의 감응(感應)에 관한 대책(對策) 제술은 전한(前漢) 때의 조조(鼂錯)와 동중서(董仲舒)를 능가했고 (무예(武藝) 시험에서) 단 한 발로 과녁을 꿰뚫었네. 낭서(郎署)를 거쳐 옥당(玉堂)에서 명성이 대단하자 임금의 총애 나날이 두터웠고, 문병(文柄, 대제학)의 자리에 오를 때 이립(而立, 30세) 나이 갓 넘었으니 국조(國朝)에서 뉘 필적할 것인가?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倭亂)이 하늘을 뒤흔드니 나라 운명이 두렵게 어찌 될 것을 몰랐는데, 공이 이때에 남북으로 분명(奔命)하며 순국 멸적(殉國滅賊)을 하늘에 맹세하였도다. 구변(口辯)으로 흉포한 왜적을 공격하고 정성으로 명(明) 나라의 재정(帝庭)을 움직여 대군(大軍)을 몰고 압록강(鴨綠江) 건너왔네. 융거(戎車)의 바퀴소리 들판을 울리고 대포(大砲)의 무서운 폭음 성마루에 진동하니 왜적의 무리 넋을 잃었도다. 삼경(三京)을 모두 회복하고 산하(山河)에 부끄러움 말끔히 씻었는데도 공은 힘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네. 험난한 전쟁터를 드나들면서 온화한 그 모습에 두려움 없었으므로 명나라 양호(楊鎬)도 굴복하였네. 임금께서 그 실상에 의뢰하여 삼공(三公)의 관직 내리자 뭇 백성들이 우러러보았네. 불탄 묘사(廟社)에 눈물 흘려 통곡하고 미죽(糜粥) 써서 주린 백성 구휼(救恤)할 제 어린아이 젖 먹이듯 하였으며, 장정(壯丁)들의 기예(技藝) 겨룸 일일이 점검하여 금위군(禁衛軍)에 대비할 제 계획을 애상(厓相, 유성룡(柳成龍))과 같이 마련했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의 병란 때 뉘 장사(長沙,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처럼 경계하였던가? 위태롭고 편안함을 담당해 풀어 나갔도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진린(陳璘)과 함께 기세 충천한 왜적을 대파(大破)한 것은 오직 공의 계책이었네. 선조(宣祖)와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였지만, 녹훈(錄勳)을 겸양하여 한 광무제(漢光武帝) 때의 풍이(馮夷)를 본받았도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 봄에 선조(宣祖)가 승하하였는데, 대절(大節)은 더욱 높았네. (진주사(進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 번이나 황제 앞에 나아가 죽을 줄 알면서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안중(眼中)엔 정확(鼎鑊, 처형(處刑)하는 기구)도 없었다네. 흉포(凶暴)한 무리 이를 갈며 날뛰니 상서로운 기린(麒麟) 자취를 감추고서 피를 토하며 계책 없이 한탄만 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당저(當宁, 현재의 임금 즉 광해군임)도 슬퍼하며 이 나라를 어찌할꼬 하였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가 등극하여 천일(天日)이 다시 밝아 오니 공에게 시호(諡號) 그제야 내렸도다. 용율(龍律)가의 묘소 앞엔 재목(梓木) 벌써 아름드리 되었건만 공의 생전(生前)에 일 어제만 같네. 비석에 글 새기니 공의 모습 다시 보는 듯하여 지나는 이 사람 절로 고개가 숙여지네.

 

각주

1) 신서(申胥) :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성(姓)은 공손(公孫)이며 신(申)이란 곳에 봉(封)한 때문으로 신서(申胥)라 칭하고, 오(吳)나라가 침입해 왔을 적에 진(秦)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오군(吳軍)을 무찌르고 초나라를 지켰음.

2) 예상(翳桑)의 진활(賑活)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영첩(靈輒)이 예상(翳桑)에서 굶주려 죽으려 할 때 조순(趙盾)이 그를 구휼했다는 고사. 예상(翳桑)이란 뽕나무의 우거진 그늘을 말함.

3) 조 영평(趙營平) :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匈奴)를 격퇴한 공이 있어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조충국(趙充國)을 이름.

4) 척포(尺布)의 요가(謠歌) : 형제간의 불화를 풍자한 노래로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동생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모반(謀反)하다가 촉(蜀) 땅으로 귀양을 가서 굶어죽으니, 백성들이 ‘한 자[尺]의 베도 바늘로 꿰매어 함께 입어야 하고 한 말[斗]의 곡식도 절구로 찧어 함께 먹어야 될 것인데,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네.’라고 불렀다는 고사(故事).

5) 제갈 무후(諸葛武候) : 삼국(三國) 시대 촉(蜀)나라 사람. 제갈량(諸葛亮)의 봉호(封號). 선주(先主) 유비(劉備)를 섬겨 제위(帝位)에 나아가게 했고, 선주의 유소(遺詔)를 받들고 후주(后主) 유선(劉禪)을 보필했음.

6) 여련왕(厲憐王) : 여(厲)는 나병(癩病)을 이름인데, 여련왕(厲憐王)이란 난세(亂世)를 당해서는 왕자(王者)도 그 신하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잘못으로 쫓겨날 수도 있어 항상 걱정을 품고 있다 하여 나환자(癩患者)가 도리어 왕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속언.

7) 함사 대영(含沙待影) : 물여우[蜮]가 모래를 입에다 머금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쏘아서 병사(病死)하게 한다고 하여, 남을 무함(誣陷)하여 해친 자들에게 비유함.

8) 이표(耳剽) :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 여기서는 겸사(謙辭)로 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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