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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이공(李公)의 묘지
만력(萬曆) 계축년 10월에 명보(明甫)가 용진(龍津)의 강가에서 작고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상(上)이 몹시 슬퍼하면서 명하여 관작을 복구시켰다. 그러자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나라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였고, 심지어 이서(吏胥), 군민(軍民), 상려(商旅), 노유(老幼)들까지도 외롭고 아득하여 의지할 곳이 없게 여기면서 각각 화재(貨財)를 내어 수의(襚衣)를 받들고 문에 찾아오는 자가 서로 줄을 이었다.
이때 나는 명보와 함께 죄를 얻어 노원(蘆原)에 숨어 지내면서 대렴(大殮)에 미쳐 달려가니, 주인이 애절하게 곡하고 뛰고 하면서 절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어떤 객이 말하기를,
“근세에 율곡(栗谷)이 작고했을 적에는 삼학(三學)의 생도들과 금군(禁軍)들이 집에 모여서 곡(哭)을 하였고, 서애(西崖)가 작고했을 적에는 시인(市人)들이 또한 집에서 곡을 하였으며, 지금 공(公)은 이름이 사패(司敗)에 있을 적에는 삼사(三司)가 교대로 상소하여 변호했는데 죽은 날에는 또 이러하니, 또한 무슨 공로가 있기에 상하(上下)로부터 이렇게 사모함을 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이르기를,‘살아 있을 적에는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고, 죽은 뒤에는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이른 말이다. 또 그가 조정에 선 지 34년 동안에 그가 수립한 것과 시행한 것으로 원근(遠近)에 입혀진 것이 마치 일월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것과 같아서 지우(智愚)ㆍ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것이 청명함을 알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리고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모두 탄식하여 몹시 슬퍼하는 것은 떳떳한 인정인 것이다.
그가 일찍이 일본의 사신을 접반했을 적에는 일본이 그 덕에 감복하였고, 일찍이 천조(天朝)의 군(軍)을 따라올 적에는 천조가 그 재능을 높게 여겼다. 그래서 우리 사신이 연경(燕京)에 조회갈 적마다 반드시 그의 기거(起居)를 묻고, 그의 출처(出處)로써 나라의 성쇠를 점쳤으니, 그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만배나 더 슬퍼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유독 한 나라뿐이겠는가. 해와 달이 비치는 곳, 서리와 이슬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덕을 입힌 것이 이토록 멀리 미쳤는데, 같은 나라 사람의 경우는 한 세상에 나서 한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시기를 하고, 시기를 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기필코 그를 죽이려고 하여, 심지어는 성명(聖明)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일월이 옆에서 환히 비추며, 귀신이 밝게 포열해 있고 어리석거나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는데도, 감히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의 밝음을 엄폐시키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였으니, 그 사람의 마음 속으로도 참으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니, 그 객이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로부터 수일 뒤에 그의 고자(孤子) 여벽(如璧)이 초췌한 모습으로 참최(斬衰)를 입고 장사를 미처 지내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곡(哭)하고 상장(喪杖)을 내려 놓고 절을 한 다음에 가장(家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자식에게 이르기를,‘노부(老夫)의 심사(心事)는 친구 이모(李某)가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종유한 모든 분들 가운데 문학이 있는 분으로는 오직 대부(大夫)만이 계시므로, 감히 묘지를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옛날에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叔向)이 그의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는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짓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지음으로써 진국(晉國)이 이를 힘입었었으니, 내가 지금에 와서 또한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너의 아버지에 대해서 나이로 따지면 조금 위이지만, 덕으로 말하자면 내가 동떨어지는데, 태평성대의 문창부(文昌府)에는 기러기처럼 연해서 올라갔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서로 교대하여 중병(中兵)의 자리에 있었으며, 만년에 무능한 재상으로 있을 적에는 형제처럼 서로 막역하여 끝까지 함께 마치었으니, 평생 동안 벼슬한 자취가 대략 서로 선후(先後)하였다. 나를 알아준 사람은 군(君)이었고, 군을 사모한 사람은 나였는데, 젊어서는 삼대에 의지한 이익이 있었고, 지금은 기마(驥)꼬리에 붙는 희망이 있으니, 감히 즐겨 기록하지 않겠느냐. ”
하고, 인하여 울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명보의 휘는 모(某)이고 한음(漢陰)은 그의 호이다. 이씨(李氏)는 광주(廣州)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고려의 말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이르러 항직(抗直)하기로 유명하여 신돈(辛旽)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하자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도망쳐 숨어 버림으로써 세상에 큰 명성을 남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름은 집(集)이고 호는 둔촌(遁村)이다. 그의 이세(二世)ㆍ삼세(三世)인 휘 인손(仁孫) 및 극균(克均)에 이르러서는 부자(父子)가 잇달아 재상이 됨으로써 이씨가 마침내 크게 되었다. 그로부터 또 이세인 수충(守忠)에 이르러 수충이 진경(振慶)을 낳고 진경이 휘 민성(民聖)을 낳았는데, 민성이 현령(縣令) 유례선(柳禮善)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유년에 명보를 낳았다.
명보는 막 나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며 순박하고 근신하여 함부로 유희(遊戲)를 하지 않았다. 11세에는 말을 내기만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12세에는 문학이 대성(大成)하였다. 14세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지나는 길에 공을 방문하여 자신이 어른이고 고귀하고를 따지지 않고 공과 수십 편의 시(詩)를 창수(唱酬)해 보고는 말하기를,
“군(君)은 나의 스승이다.”
고 하였다. 20세에 등제(登第)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가니, 선종(宣宗)이 장차 《훈의강목(訓義綱目)》을 강(講)하게 하려고 명하여 재신(才臣)을 뽑아서 내장(內藏)의 어질(御帙)을 특별히 하사하고 이를 강독(講讀)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하므로, 율곡(栗谷)이 5인을 천거하여 올렸는데, 나와 명보가 그 천서(薦書)에 함께 올랐으므로 한때에 이 일을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갑신년에는 황(黃)ㆍ왕(王) 두 조사(詔使)가 한강(漢江)에서 노닐면서 말하기를,
“듣건대 조선에 이모(李某)란 사람이 있다 하니,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하였으나, 명보가 예(禮)에 사적으로 만나보는 일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러자 왕공(王公)이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었는데, 그 소서(小序)의 대략에,
“그대의 풍도와 기상이 범류(凡類)에 월등히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서로 만나 보지 못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어 신교(神交)로 삼는 바이다.”
고 하였다.
고사(故事)에 옥당 참하(玉堂參下)와 서당 사가(書堂賜暇)를 한때의 제일 가는 청선(淸選)으로 여겨 등영(登瀛)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 선종이 명하여 《강목》을 내리고 나서 이어 옥당과 서당의 선발을 재촉하였는바, 율곡이 이때 문형(文衡)을 맡고 있으면서 실로 이 일을 주관하였었다. 계미년 이후로는 조론(朝論)이 엇갈리어 가부(可否)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명보는 후배로서 명성이 자자하였고, 나 또한 조그마한 명성으로 명보와 함께 응선(應選)의 인망이 있었다. 그러자 한 재상이 밤중에 율곡을 찾아가서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양이(兩李)는 과연 인망은 있으나 그들의 의향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천거하여 시사(時事)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고 하자, 율곡이 말하기를,
“두 사람의 명성이 한창 성한데, 어찌 어진 이들을 엄폐시킬 수 있겠는가. 또 사람을 천거하는 데는 인재를 얻는 것을 귀히 여기는 법인데, 어찌 의향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한밤중까지 쟁론을 벌였으나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명년 봄에 상이 서총대(瑞葱臺)에 행행하였는데, 이때 명보가 응제(應製)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하였다. 이후로는 싸웠다 하면 전군(全軍)의 으뜸이 되어 감히 그 예봉을 겨룰 자가 없었다. 일찍이 정시(庭試)를 보이도록 명하여 시험 볼 날짜가 아직 남아 있었는데, 함께 선발되어 고제(高第)를 겨루는 자가 먼저 정원(政院)에 묻기를,
“명일 이모가 반드시 시험에 응할 것인데, 또 고제를 차지할까?”
하였다. 명보가 그 말을 듣고는 병을 핑계로 응시하지 않으니, 논(論)하는 이가 말하기를,
“싸울 적마다 이기고 공격할 때마다 취하기란 본디 어려운 일이거니와, 적(敵)이 약한데도 나의 예봉을 감추고 뒤로 물러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고 하였다. 부수찬(副修撰)에 승진되고 이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부교리(副校理),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무자년에는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ㆍ평의지(平義智)가 오자, 명보로 하여금 그들을 영접하게 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특별히 승진시켰다. 이때 두 사신은 명보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는 벌써 놀라는 표정으로 공경하는 태도를 지었고, 주연(酒宴)을 베풀기에 미쳐서는 그들이 명보에게 보답의 사신으로 일본에 와 주기를 힘써 청하였다. 이때 명보가‘일본이 근래에 입구(入寇)하여 우리 변민(邊民)에게 노략질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리도 신의가 없는가.’라는 내용으로 그들을 책망했는데, 일본이 그 사실을 듣고는 즉시 우리 인민 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선종이 명보를 가상하게 여기어 직제학(直提學)에 뛰어올려 임명하고 인하여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경인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진되고 이어 우승지,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신묘년에는 예조 참판(禮曹參判) 겸 대제학(大提學)에 뛰어올려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나이가 31세였다. 본국의 관직은 문형을 중시하여 아무리 홍재 석유(鴻才碩儒)라 할지라도 이력(履歷)이 오래되고 품질(品秩)이 높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가기가 어려웠는데, 명보는 인망과 실제가 모두 높았으므로, 조정 안의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서 오르기를 사양하여, 우이(牛耳)를 잡는 데 있어 감히 그 손을 끌어당길 이가 없었다. 그래서 상이 가선(嘉善)으로 특별히 승진시킨 것은 또한 먼저 그 바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에서 회천(會薦)할 때에 미쳐 여러 사람의 천거에 딴마음이 없었는데, 명보에게 유독 권점(圈點) 하나가 적었으므로 온 좌중이 경악하여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동원(東園) 김 상공 귀영(金相公貴榮)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 짓이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그런데 김 상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고 지위는 낮은 사람이 행실은 제로(諸老)보다 앞섰으나, 재덕(才德)이 노숙해지기를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였으나, 명보는 그 사실을 듣고 흔연히 깊이 복종하니, 한때의 사론(士論)이 두 사람을 다 훌륭하게 여겨 아울러 칭찬하였다.
임진년에는 일본이 대거 쳐들어와서 이모(李某)를 만나서 강화(講和)할 것을 요청한다고 선언(宣言)하였다. 그러자 선종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을 하였으나, 조정에서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이때 나는 도승지로 빈청(賓廳)에 있었는데, 명보가 문 밖에 서서 서로 만나기를 요청하므로, 내가 나가서 만났더니, 명보가 내 손을 끌어잡고 말하기를,
“지금 적(賊)이 나를 만나기를 요구하니, 내가 가기를 청하고 싶네. 적들이 깊이 쳐들어왔는데, 어떻게 어려움을 사피(辭避)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입대(入對)하여 가기를 청하고 단기(單騎)로 달려 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적들이 이미 어수선하게 여기저기 퍼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되돌아와 한강에 당도하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쪽으로 행행하였다. 그래서 뒤따라 평양(平壤)에 당도하니, 적들이 대동강(大同江)에 핍박해 오므로, 또 나와 만나기를 청하여 서로 만나서 논의한 결과, 명보가 또 적진에 가기를 요청하여 단가(單舸)로 강중(江中)에서 적들과 만났다. 이날 그 모임을 목격한 군신(群臣)ㆍ제장(諸將)들은 두려워서 용색(容色)을 변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명보는 적을 보고 대의(大義)로써 책망할 적에 사기(辭氣)가 오히려 장렬하였다. 그리하여 뒤에 현소(玄蘇)가 자주 사람들에게 명보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황급한 중에서도 사어(辭語)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니, 참으로 미칠 수가 없다.”
고 하였다. 처음에 명보가 행재소(行在所)에 뒤따라와서 밤에 대동강을 건너 곧바로 나의 처소로 와서 수일 동안 함께 묵었다. 이때 나는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서로 이불을 연해 덮고 밤에 담화를 나누면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고자 하나, 조정의 의논이 극구 반대하므로, 지금까지 걱정스럽고 답답하기만 하네.”
하니, 명보가 즉시 넓적다리를 치면서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네. 명일에 우리 두 사람이 극력 쟁론하면 그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네.”
하고, 인하여 서로 계획을 정하였다. 그리고는 날이 샐 무렵에 입조(入朝)하여 명보가 그 편의한 점을 말하자, 대신이 처음에 난색을 지으므로 명보가 항언(抗言)하여 굳게 쟁론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에 결정되었다. 이때 적세(賊勢)가 날로 핍박해 오므로, 선종은 또 평양을 출발하여 정주(定州)에 도착해서는 신하들을 인견하고 계책을 물었다. 그래서 내가 명보와 함께 서로 다투어 천조에 들어가서 상서(上書)하여 구원을 요청할 것을 청하였으나, 한밤중에 이르도록 상은 오히려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진언하기를,
“신은 듣건대, 천하(天下)는 형세일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 형세가 만일 구원할 만하다면 두 신하가 가지 않더라도 구원병이 의당 나오게 될 것이고, 형세상 구원할 수가 없다면 비록 두 신하가 함께 가더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신하가 본국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진실로 신복(信服)하는 처지이지만, 중조(中朝)에 있어서는 일개 배신(陪臣)에 불과한데, 중조에서 그 현부(賢否)를 어떻게 알아서 이 두 신하를 위하여 이미 결정된 의논을 돌리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모(李某)는 지금 병조 판서의 직에 있으니 더욱 멀리 떠나서는 안 되고, 부득이하다면 덕형(德馨)은 보낼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정히 이와 같다.”
하고, 마침내 명보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명보가 출발하려고 할 적에 내가 남문(南門)까지 전송을 하였는데, 명보가 말하기를,
“쾌마(快馬)가 없어 이틀 길을 하루에 빨리 달려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럽네.”
하므로, 내가 즉시 내가 타던 말을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의당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하고 서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네.”
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의당 노룡산(盧龍山)에 뼈를 버리고 말지, 재차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을 것이네.”
라고 하여, 우리 두 사람이 눈물을 뿌리면서 작별하였다.
명보가 천조에 이르러서는 여섯 번이나 상서하여 울면서 호소하니, 순안어사(巡按御史) 학걸(郝杰)이 명보의 비분강개한 사어(辭語)를 보고는 가엾게 여겨 용색(容色)을 고치고, 미처 상주(上奏)하기 전에 편의에 따라 조승훈(祖承訓) 등 세 장수를 파견하여 먼저 적봉(賊鋒)을 시험해 보게 하였는데, 모두 패하여 퇴각하자, 마침내 5만의 대군(大軍)을 징발하여 보냈으니 이를 10만이라 호칭하였다.
다음해 봄에 의주(義州)에 이르러 명보가 도헌(都憲)으로 대병(大兵)을 빈접(儐接)하였다. 이때 삼경(三京)이 폐허가 되고 팔로(八路)가 패하여 무너졌는데, 명보가 군중(軍中)에 있던 때에는 여러 장수들에게 응대하고 군량(軍粮)을 힘써 조달하면서 항상 막부(幕府)의 주책(籌策)에 참여하여 제독(提督)이 누차 자기의 의견을 굽힘으로써, 마침내 평양에서 승첩을 거두고 송경(松京)과 한양(漢陽)을 수복하였다. 그래서 선종이 명보를 가상하게 여기어 작질을 더해서 형조 판서로 삼았다.
4월에 천병(天兵)이 한양에 들어왔다. 이때 구도(舊都)가 막 병란(兵亂)에 깎이어 전사한 시체는 길에 가득하고 굶어 죽은 송장은 구렁에 그득 찼는데, 명보가 사민(士民)들을 진휼하여 살리고 인하여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으며, 서적(書籍)들을 거두어 모으면서 사 가거나 유실되는 것에 대비하였다. 천병이 돌아간 뒤에는 상께 청하여 집에 돌아가 아버지를 뵈었다. 이해 겨울에는 천자(天子)의 명으로 세자(世子)가 병조와 호조의 관원을 감독 인솔하여 전라도ㆍ경상도의 사이에 주둔하면서 군사(軍事)를 책응(策應)하게 되어, 내가 분조(分曹)의 병조 판서로 따라가게 되자, 명보가 본조의 병조 판서를 대신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숙천(肅川)에 있을 적에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시켜서 장전(帳殿)을 호위하게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명보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마음을 합해 규획하여 그 일을 크게 벌여서 진(陣)을 설치하고 무기를 제조하는 데 있어 모두 중조(中朝)의 양식을 따라서 하고, 인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해서 군수(軍需)를 보조하니, 공사(公私) 에 다 힘입은 것이 있었다.
갑오년에는 내상(內喪)을 당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선종이 국사가 한창 어려워서 이모(李某)가 아니면 능히 해낼 수 없다 하여, 상을 마치기도 전에 복상(服喪)하려는 인정을 빼앗고 기용하려 하자, 명보가 아홉 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적이 물러가지 않은 것을 염려하지 않고 경(卿)이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하고, 사지(辭旨)를 준절히 하여 소명(召命)에 따라 나오도록 재촉하니, 마지못해 억지로 입조(入朝)하여 이조를 거쳐 병조 판서에 전임되었다. 이때 호서(湖西)의 반적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선동하다가 패하여 참수되었는데, 그 잔당을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적이 명보의 공훈과 명망이 성대함을 의식하여, 대질(對質)하는 즈음에 명보를 빙자해서 말을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40일에 이르도록 석고대명(席藁待命)하였으나, 선종이 끝내 고집하여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서 일을 보다가, 또 열 번이나 상소를 하고서야 비로소 체직이 윤허되었다. 병신년에는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윽고 이조로 전임되고, 내가 또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정유년에는 적이 재차 준동하자, 천자가 네 사람의 대장(大將)을 파견하여 10만의 군대를 보냈는데, 어사(御史) 양호(楊鎬)가 군대를 감독하였다. 양공(楊公)은 나이가 젊고 기(氣)가 예민하여 천하의 선비를 가벼이 보고 걸핏하면 기세로써 압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였다. 그래서 선종이 명보가 지난번 이 제독(李提督)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상하(上下)의 인심을 얻었던 관계로 명보에게 명하여 가서 그를 빈접하게 하였다. 그런데 양공이 명보를 한 번 보고는 바로 감복하였다. 명보가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적이 이미 기전(畿甸)에 핍박해 오고 있으니, 만일 한번 한강을 건너기만 하면 한강 서쪽은 다시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된다. 지금 바로 달려가면 아직은 구할 수가 있다.”
고 하니, 양공이 마침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가서 더욱 급하게 전쟁을 독책하여 직산(稷山)에서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경도(京都)가 재차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는 명보의 힘이었다. 그 후 양공이 남쪽으로 정벌하여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포위할 적에도 명보가 또한 대군(大軍)을 따라 막부(幕府)에 있었는데, 이때 마침 큰눈이 내려서 인마(人馬)가 얼고 굶주리게 되자, 천병(天兵)이 군영(軍營)으로 물러와 묵고 있었다. 이때 양공이 명보가 군중에 있으면서 용감하여 과단성이 있고 기(氣)가 더욱 엄숙해짐을 보고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여기어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비록 중조(中朝)에 있더라도 재상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데, 아직까지 백관(百官)의 위치에 있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선종은 그 말을 들은 즉시 명보를 우의정에 임명하였으니, 이때 명보의 나이 38세였다. 이윽고 좌의정에 승진되고, 내가 그 뒤를 밟아 우의정이 되었다.
그 후 제독 유정(劉綎)이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미쳐서는, 선종이 유 제독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유 제독이 ‘모름지기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능 있는 신하로서 본국의 제일인자인 사람을 얻어야만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계속해서 말하자, 선종이 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뜻을 둔 데가 있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를 가리킨 말일 것입니다.”
하니, 인하여 명보에게 종정(從征)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유 제독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공(李公)을 얻었으니, 내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였다. 순천(順天)에 이르자, 적추(賊酋) 행장(行長)의 형세는 더욱 군박하게 되었는데, 유 제독이 행장에게 간첩을 보내 은밀히 사정을 일러 주고 그를 놓아 주어 도망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그 상황을 알아차리고 먼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으로 하여금 수군 제독(水軍提督) 진린(陳璘)에게 고해서 함께 적을 공격하게 한 결과, 과연 함께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항구(港口)에서 적들을 기다렸다가 적을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신축년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로 1년여 동안 남쪽에 있다가, 임인년에 들어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계묘년에는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변이 있자, 선종이 2품 이상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득실(得失)을 말하게 하였는데, 명보가 일을 말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리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체직되었다. 이때 명하여 호성(扈聖)ㆍ선무(宣武) 등의 공신을 책록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일을 인하여 난리 초기에 명보가 구원병 요청한 일을 가리켜 진술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모는 왜노(倭奴)가 그득 찬 때를 당하여 일엽편주를 타고 가서 적추(賊酋)를 만났으니, 망신 순국(忘身殉國)하는 사람이 아니면 해낼 수 없었다.”
하고, 명하여 두 공훈에 다 책록하게 하였다. 명보가 그 명을 듣고는 차자(箚子)를 올려 매우 강력하게 사양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감정(勘定)하는 날에 명보를 시기하는 대신(大臣)이 있어 명보의 사양한 차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니, 한로(漢老)가 공훈을 사양한 것은 타당한 일이다.”
하고, 매우 강력하게 고집하므로, 좌우에서 서로 쟁론을 벌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신년에는 선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임서인(臨庶人)의 옥사(獄事)를 만나서, 상이 진(珒)의 처리에 대한 타당점을 물으므로, 내가 의당 사은(私恩)을 온전히 하여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의논을 드렸더니, 그 의논을 본 조신(朝臣)들이 허둥지둥하며 서로 돌아보았고, 명보는 말하기를,
“나 또한 그 말과 같은 생각이다.”
고 하였다. 낭관(郞官)이 나에게 와서 이상의 사실을 고하므로, 나는 놀라며 말하기를,
“상상(上相 영의정을 이름)이 말단(末段)의 말을 살피지 못한 듯하니, 시험삼아 가서 다시 여쭈어 보라.”
고 했더니, 명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다만 내가 연명(聯名)만 했을 뿐이다.”
하고, 기뻐하며 동요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또한 상소하여 이 의논을 진술하였고, 이 완평(李完平 완평부원군 이익(李翼)을 이름)은 차자를 인하여 이 의논을 대략 언급하였다. 그러자 한때의 논자(論者)들이 시끄럽게 힘주어 공격하면서 역적을 비호한다고 하여, 사태가 불측하게 되었는데, 상은 양쪽을 다 옳게 여기면서 아울러 쟁론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조의(朝議)가 마침내 집법(執法)과 전은(全恩)의 두 가지로 나누어졌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심화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중조(中朝)에서 엄(嚴)ㆍ만(萬) 두 차관(差官)을 보내어 본국의 일을 조사 신문하였고, 또 고부사신(告訃使臣)은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중조에서 즉시 봉왕(封王)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치계(馳啓)해 오므로, 상하(上下)가 모두 걱정되고 황급하였다. 그래서 상이 또 명보를 보내어 진주(陳奏)하게 하였다. 그러자 명보는 ‘엄ㆍ만 두 차관이 곧 본국을 출발할 것이니, 만일에 불행하게도 그들이 먼저 본국을 무고해 버린다면 우리 사신이 계속 가서 아무리 뛰어난 말솜씨로 설득을 시키려 하더라도 그 말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먼저 경사에 가서 그 실상을 갖추 진주하는 것이 최선의 방도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27일 만에 경사에 당도하였다. 그리하여 5개월 동안 경사에 머물면서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오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특명으로 그 아버지 아무에게는 당상(堂上)으로 뛰어올려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고, 또 그 아들에게는 6품의 관직을 임명하고 인하여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배수(倍數)로 하사하였다.
기유년 가을에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임자년 봄에는 해서(海西)의 역옥(逆獄)이 일어났고, 계축년에 이르러서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계속하여 일어나서 일이 궁금(宮禁)에 관련되어 임자년보다 더욱 위태로웠다. 당시에 상은 해마다, 날마다 털끝만한 것 이상까지 친국(親鞫)을 하여 일찍이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공평하게 신문하도록 한 적이 없었고, 또 참설(讒說)이 해독을 끼침으로써 일이 대단히 중난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때 명보는 수상(首相)이었고 나는 좌상(左相)으로서 날마다 국정(鞫庭)에 모시고 참여하였는데, 명보는 정도를 지켜 평번(平反)을 하면서 강직하여 아종(阿從)하지 않았다. 이때에 삼사(三司)에서는 서로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라고 청하고, 또 삼공(三公)에게는 반드시 백관을 거느리고 정쟁(庭爭)을 하게 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상이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이 전상(殿上)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정의(廷議)가, 대신(大臣)이 즉시 복합(伏閤)하지 않는 것을 허물로 삼으니,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밖으로 나왔더니, 명보 또한 따라서 물러나와 묻기를,
“정의가 이러하니 화가 장차 대신에게 먼저 미칠 터인데, 자네는 어떻게 하려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의 뜻은 무신년의 의논에 있을 뿐이네.”
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죽을 것인가?”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내란(內亂)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내가 하필 영창대군을 위해서 죽는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하려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자네가 수상으로서 의당 이 의논을 단정하여 그를 대궐 밖으로 내쳐서 안치시키도록 한다면 나는 의당 머리를 숙이고 따를 것이네, 그러나 만일 삼사의 의논대로 반드시 전인(甸人)에게 맡겨서 목매달아 죽인다면 부득불 이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일세.”
하니, 명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바로 나의 뜻이네.”
하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백관이 복합했을 적에 명보가 대궐 밖으로 내쳐서 안치시킬 일로 말하였더니, 그로부터 수일 뒤에 한 권력 잡은 신하가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은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데, 대신의 계사(啓辭)에는 내쳐서 안치시키기만을 청하였으니, 백관의 종사(宗社)를 위하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매우 침범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미 여러 사람의 뜻을 알았다.”
하고, 계(啓)를 초(草)함에 미쳐서는 앞서의 의논을 굳게 지켜 변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에는 그 사람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구차하게 대신과 행동을 같이할 수 없다.”
하였으므로, 명보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오지 않을 것인가. 사람마다 각기 견해가 있는 것이니, 자기의 뜻대로 하도록 맡겨 둘 뿐이다.”
하였다.
옥사(獄事)는 날로 급해가는데, 외간에서 혹자가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바로 정조(鄭造), 윤인(尹訒)이 대관(臺官)으로 피혐(避嫌)하여 으뜸으로 이 논의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명보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네. 지금 조정 사람들이 굳게 고집하여 상을 기만하고 또한 아랫사람을 협박하는 데에 세 가지 설(說)이 있네. 첫째는‘의리가 분명하지 않다.〔義理不明〕’고 하는데, 나 또한 의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바이고, 둘째는‘역적 토벌이 엄격하지 않다.〔討逆不嚴〕’고 하는데, 나 또한 역적 토벌이 엄격하지 않다고 말하는 바이며, 셋째는‘역당을 비호한다〔庇護逆黨〕’고 하는데, 나 또한 역당을 비호한다고 말하는 바인데, 다만 위주하여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를 뿐이네. 그 이른바 역적이란 것에 대해서는 그 역상(逆狀)이 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엄격하게 토벌하지 못하고 언의(讞議)할 때에 이르러서도 말이 또는 분명하지 못하니, 진실로 역적인데도 유사(有司)가 이렇게 하는 것으로 보면 의리가 과연 분명하지 못한 것이네. 그리고 지금 신하로서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는 것은 참으로 역신(逆臣)의 행위이니, 참으로 역신의 정상을 알았으면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토벌을 어찌 감히 엄하게 하지 않겠으며, 역당을 어찌 감히 비호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에 영창대군을 위해서 죽었다면 용맹을 상하는 일이었고, 오늘날에는 모후(母后)를 위해서 죽지 않으면 의리를 상하는 것이니, 어찌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ㆍ윤인에게 가리어져서 천하에 누(累)를 입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먼저‘성효(誠孝)를 다하여 자전(慈殿)을 위안시키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계(陳啓)하고 면려시켜서 상이 깨닫기를 기다리고, 인하여 대관(臺官)의 부도(不道)한 정상을 말하여 힘을 다해서 남김없이 격파하는 것이 좋겠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안 되네. 우리들의 계사(啓辭)가 절반도 못 가서 천위(天威)가 진노할 것이고, 혹 대간(臺諫)의 저격을 받더라도 형편상 말을 다하기 어려울 것이네. 대관이 이미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여 상의 총명을 현혹시키고 있는데, 이 일을 반드시 대신에게 물을 것이네. 그런데 내가 《춘추》를 대략 익히었으니, 의당 경의(經義)를 인용 증거대어 조목조목 공파(攻破)해야 하기에 지금 이미 그 자료를 머리 속에 갖추어 놓았네. 그리고 혹 헌의(獻議)를 인해서나, 혹은 차자를 올려서라도 인하여 영창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네.”
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시험삼아 초(草)를 갖추어 나에게 보여 주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대궐에 나가니, 명보가 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 수일이나 기다릴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은 마치 타는 것 같으니, 오늘 들어가 아뢰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내가 안 된다고 말하고, 인하여 초(草)한 것을 보여 주니, 명보가 기뻐하면서 매우 좋다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2일 뒤에 양사가 먼저 나를 탄핵하므로, 나는 동강(東江)에서 사죄(竢罪)하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남으로부터 명보는 더욱 갈팡질팡하여 의뢰할 곳이 없었고, 국사(國事)를 돌아보고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걱정한 나머지, 매양 사제(私第)에 돌아가기만 하면 지붕을 쳐다보고 울먹였으며, 매양 밥도 물리쳐 먹지 않고 오직 냉주(冷酒)만 가져오게 하여 마음을 위로할 뿐이었다.
그 후 김제남(金悌男)이 국구(國舅)로서 사사(賜死)되고, 한창 고부(告訃)의 타당 여부를 의논할 적에는 명보가 《춘추》의‘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거나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의논을 하니, 시의(時議)가 크게 경악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은 또 정청(庭請)을 윤허하여 영창대군을 내쳐서 안치시켰는데, 논하는 자는 또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니, 그는 우리들의 처음 의논이 본디 이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는 명보의 우뚝한 의지를 굽히기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서, 화복(禍福)으로 명보를 동요시킬 수 있다고 여기어, 명보에게 먼저 그 의논을 제창하도록 재촉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명보가 차자를 올려 자신의 뜻을 보여 주자, 이에 물의(物議)가 흉흉해져서 지난번에 침범하던 자가 이것을 인하여 명보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한두 신진(新進)이 그의 뜻을 미리 영합하여 옥당(玉堂)에서 팔을 뽐내며 안률(按律)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창하니, 삼사(三司)가 같은 말로 강한 정쟁(庭爭)을 벌인 것이 달포가 넘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상은 삭직(削職)만을 명하였다. 그래서 8월에 명보가 물러나 용진(龍津)으로 돌아왔고 이때 나이 53세였는데, 병을 얻은 것이 날로 악화되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대단히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모후를 폐하자는 의논이 일어났을 적에 명보는 급격히 공격하려고 했으나, 내가 시기를 기다리고자 하여 끝내 나의 의논을 따랐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패하여 물러나자, 명보가 고립되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작고하여 후세의 지사(志士)들로 하여금 천고에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니, 내가 명보를 그르친 것이 많도다.
그 배(配)는 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딸인데, 3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 여규(如圭)는 음보(蔭補)로 군수가 되었고, 다음 여벽(如璧)은 현감이고, 다음 여황(如璜)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으며, 딸은 생원 정기숭(鄭基崇)에게 시집갔다.측실(側室)에서는 4남 3녀를 낳았다. 여규의 2남은 상건(象乾)ㆍ상곤(象坤)이고, 1녀는 이기조(李基祚)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2인은 어리다. 여황의 2녀는 어리다. 이듬해인 갑인년 정원 3일에 양근산(楊根山) 부인(夫人)의 묘에 합장할 것이다.
명보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정신이 빼어나고 밝았는데, 겸손함과 신중함을 스스로 지키어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고, 평소에 마치 무능한 것처럼 너무 신중하여 재능의 만분의 2, 3도 쓰지 않았으나, 오히려 천하의 명사(名士)가 되었다. 그러니 만일 어진 임금을 만나서 간직하고 있는 재능을 남김없이 내놓았더라면 그 공덕(功德)이 사람에게 미치는 것과 사람들이 명보를 우러러 사모하는 것이 의당 어떠하였겠는가. 그리고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종족 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구휼한 어짊에 이르러서는 명보에게 경중(輕重)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갖추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명보가 어진 이를 추천하고 재능 있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피(子皮)와 같고, 빈객(賓客)과 응대(應對)를 잘하기로는 숙향(叔向)과 같고,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없기로는 송경(宋璟)과 같고, 선비를 높이고 선(善)을 좋아하기로는유정(留正)과 같고, 사당(私黨)을 만들지 않는 것은 사마광(司馬光)과 같다. 이것을 모두 겸하여 실행하였으므로, 위로 진(晉)ㆍ정(鄭)의 사이에서 났으면 명대부(名大夫)가 되었을 것이고, 아래로 당(唐)ㆍ송(宋)의 즈음에 났더라면 현재상(賢宰相)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모는 마음이 커서 일을 당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고 했었다. 그런데 과연 이것 때문에 시인(時人)들에게 거슬리었고, 또한 이것 때문에 후세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일은 비록 숨길 수 있으나, 말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곡(哭)을 그치고 일을 기록하노라니, 슬픔을 글로 다 형용할 수 없으나 비속함을 잊고 몰래 말하고 숨겨 써서 묘에 묻는 바이다.
[주-D001] 이름이 …… 적 : 사패(司敗)는 사구(司寇)와 같은 뜻으로, 춘추 시대에 형죄(刑罪)를 관장하던 관명(官名)이니, 즉 사법(司法) 기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바로 이덕형(李德馨)이 당시에 죄에 걸려 처벌을 받았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2] 삼대〔麻〕에 …… 있었고 : 선인(善人)과 사귐으로써 자신도 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대대례(大戴禮)》증자제언(曾子制言)에 “쑥대가 삼밭 속에 나서 자라면 붙들어 바로잡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진다.〔蓬生麻中 不扶自直〕”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 기마〔驥〕…… 있으니 : 파리가 기마 꼬리에 붙으면 천 리를 갈 수 있듯이, 명망 높은 사람과 가까이함으로써 자신도 입신 양명(立身揚名)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 등영(登瀛) : 등영주(登瀛州)의 준말인데, 영주는 신선(神仙)이 산다는 해중(海中)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기에 오르면 영광스럽다 하여 영예로운 지위에 오름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5] 우이(牛耳)를 …… 있어 : 여기서는 문단(文壇)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의미한다. 춘추 시대 제후(諸侯)들이 회맹(會盟)할 적에 맹주(盟主)가 소의 귀〔牛耳〕를 잡아 베어 피를 취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6] 중획(重獲) : 획은 적에게 피살(被殺)된 것을 말하므로, 중획은 곧 적에게 피살된 시체들이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7] 장전(帳殿) : 장막(帳幕)으로 둘러싼 궁전이란 뜻으로, 즉 행궁(行宮)을 의미한다.
[주-D008] 한로(漢老) : 호가 한음(漢陰)인 이덕형(李德馨)을 높여 일컬은 말이다.
[주-D009] 임서인(臨庶人) : 선조(宣祖)의 서자(庶子)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가리킨다.
[주-D010] 평번(平反) : 원죄(冤罪)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無罪)로 만들거나 감형(減刑)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1] 무신년의 의논 : 앞서 무신년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광해군(光海君)이 이항복(李恒福)에게 임해군에 대한 처리 문제를 묻자, 이항복이 ‘의당 사은(私恩)을 온전히 하여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의논드렸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12] 전인(甸人)에게 …… 죽인다면 : 전인은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인데, 옛날에 공족(公族)이 죽을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시조(市朝)에서 처형하지 않고 전인에게 맡겨서 목매달아 죽이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禮記 文王世子》
[주-D013] 자피(子皮) :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상경(上卿)이었던 한호(罕虎)의 자인데, 그는 국정(國政)을 잘 다스려 명성이 높았고, 일찍이 자산(子産)의 어짊을 알아보고 그에게 정사를 맡겨 주었었다.
[주-D014] 숙향(叔向)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大夫) 양설힐(羊舌肸)의 자인데, 그는 외국(外國)에 사신 가서나, 외국의 빈객을 접대할 적에 응대(應對)를 잘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주-D015] 송경(宋璟) : 당 현종(唐玄宗) 때의 현상(賢相)으로, 요숭(姚崇)과 함께 개원(開元) 연간의 훌륭한 치적을 이룩했었다.
[주-D016] 유정(留正) : 남송(南宋) 때의 현상(賢相)으로서 그는 특히 재능 있는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다.
출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040_010_0020_2002_001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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