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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력 | 서기 | 연령 | 기사 |
명종 11 | 1556 | 1 |
10월 15일, 서울 서부 양생방에서 태어나다.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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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9 | 1564 | 9 |
10월, 부친상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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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4 | 1571 | 16 |
9월, 모친상을 당하다. ○ 이후 매부 민선(閔善)의 집에서 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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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7 | 1574 | 19 |
권율의 딸 안동권씨와 혼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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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8 | 1575 | 20 |
진사 초시에 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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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1 | 1578 | 23 |
장자 이성남이 태어나다. ○ 한음 이덕형과 교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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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3 | 1580 | 25 |
알성시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다. ○ 9월, 흥문록(조선시대 홍문관 관원의 후보자)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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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4 | 1581 | 26 |
예문관 검열이 되다. ○ 율곡의 추천을 받아 「통감」을 강(講)할 학사에 뽑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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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6 | 1583 | 28 |
사가독서하다. ○ 정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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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7 | 1584 | 29 |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다. 붕당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이발(李潑)을 논핵하다. ○ 가을, 병으로 체직되다(물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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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8 | 1585 | 30 |
봄, 예문관 봉교가 되다. ○ 전적이 되었다가 정언으로 옮기고 지제교를 겸하다. ○ 이조 좌랑이 되다. ○ 겨울, 수찬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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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9 | 1586 | 31 |
다시 정언이 되다. ○ 8월, 수찬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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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0 | 1587 | 32 |
교리가 되다. ○ 측실오씨(側室 吳氏)를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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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1 | 1588 | 33 |
12월, 이조 정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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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2 | 1589 | 34 |
예조 정랑이 되다. ○ 10월,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문사랑(죄인의 취조서를 작성하여 읽어 주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국문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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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3 | 1590 | 35 |
6월, 응교가 되었다가, 검상, 전한, 직제학을 역임하다. ○ 8월,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동부승지에 초배되다. ○ 문신정시에서 수석하여 어구마(임금이 타기 위하여 대궐 안에서 기르던 말)를 하사받고 우승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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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4 | 1591 | 36 |
호조 참의가 되다. ○ 도승지가 되었다가 정철을 변호한 문제로 파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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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 | 1592 | 37 |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지로 이조 참판에 제수되어 왕자 신성군과 정원군을 평양으로 호종하다. ○ 6월,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관에 특배되고, 이어 대사헌, 병조 판서가 되다. ○ 이덕형과 함께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를 건의하고, 조도사(지방에 파견되어 군량과 물품을 징발하여 수송하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를 삼남(충청, 전라, 경상)에 보내 군량을 조달하게 하다. ○ 9월, 홍문관 제학을 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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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 | 1593 | 38 |
1월, 세자우부빈객이 되다. ○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사신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키도록 선유하다. ○ 평양이 수복되자 서울로 진군할 것을 주장하다. 10월, 서울로 돌아오다. ○ 명나라 행인 사헌이 입국하니, 원접사가 되어 맞이하다. ○ 12월, 분병조판서로 광해군을 배행하여 홍주에 주둔하다. 이어 전주로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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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7 | 1594 | 39 |
4월, 전라도의 산성을 순심하다. ○ 7월, 병조 판서가 되다. ○ 가을, 주사대장(수군을 맡아 지휘하는 장수)을 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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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8 | 1595 | 40 |
3월, 이조 판서가 되다. ○ 8월, 양관대제학 겸 지의금부사가 되다. ○ 11월, 우참찬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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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9 | 1596 | 41 |
1월, 홍문관 제학이 되다. ○ 2월, 봉왜명사 양방형의 접반사로 영남으로 내려가 경주에 머물다. ○ 4월, 의령에서 서울로 올라오다. ○ 5월, 왜적의 동태를 서장으로 올리다. ○ 8월, 병조 판서가 되다. ○ 겨울, 의주까지 양방형을 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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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0 | 1597 | 42 |
3월, 의주에서 돌아와 병조 판서가 되다. ○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리 양호를 구련성에서 맞이하다. ○ 병으로 체직되다. ○ 9월, 다시 병조 판서가 되다. 왜란을 전후로 5번이나 병조 판서를 맡아 군정과 군량의 수급을 잘하여 양경리(楊經理)의 찬탄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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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1 | 1598 | 43 |
10월, 우의정이 되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지다. ○ 명의 병부 찬획주사 정응태가 조선을 무함하자 진주사가 되어 베이징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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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2 | 1599 | 44 |
윤4월, 베이징에서 돌아와 복명하다. ○정응태 무고 사건으로 백유함이 국문을 당하자 극력 변호하다. ○ 5월, 화의를 주장했던 이유로 류성룡이 탄핵을 당하자 함께 자열하고 11번이나 사직소를 올리다. ○ 9월, 좌의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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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3 | 1600 | 45 |
1월, 도원수 및 체찰사에 임명되어 제로(諸路)를 선무(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하다. 호남의 역역(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을 관대하게 하고, 해로의 방어책 16조목을 올리다. ○ 6월, 전라도, 충청도를 순심하고 서울로 돌아와 복명하다. ○ 여름, 영의정이 되다. ○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인산, 시호 및 장지에 대해 의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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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4 | 1601 | 46 |
2월,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출사하지 않다. ○ 5월, 호종공신에 녹훈되다. ○ 6월, 강석(강연하는 장소)에서 사간 송영구가 이항복을 칭찬한 일로 청풍 군수로 폄직되자 사직하다. ○ 7월, 소명에 따라 출사하다. ○ 8월, 제주 역적 소덕유, 문충기를 추국한 공로로 숙마를 하사받다. ○ 12월, 문경호가 상소하여 최영경의 원사에 대하여 그 배후로 성혼을 지목하자 상차(차자를 올림)하여 극력 변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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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5 | 1602 | 47 |
윤2월,박인손이 상소하여 정철의 심복이라고 지척하자 정사(관원이 사정으로 말미암아 국왕에게 사직·휴직·휴가 등을 청하는 문서)하여 영의정에서 체직되다. ○ 5월, 출사하라는 하유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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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6 | 1603 | 48 |
1월, 차자를 올려 군기시 제조를 사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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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7 | 1604 | 49 |
4월, 영의정에 제수되다. ○ 간당(간사한 무리)으로 지목되었다는 이유로 정고하여 영의정을 사직하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호성공신 1등에 봉해지다. ○ 류희서 암살 사건으로 변양걸이 유배되고 이덕형이 파직되자 다시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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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9 | 1606 | 51 |
5월, 왜와의 국교 재개를 헌의하다. ○선조의 사친인 덕흥대원군의 추존 논의를 중지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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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41 | 1608 | 53 |
2월, 선조가 승하하자 산릉에 대하여 헌의하다. ○ 임해군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원익, 정구 등과 함께 전은설을 주장하다. ○ 4월, 좌의정 겸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에 제수되다. ○ 8월, 목릉의 산역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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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 | 1609 | 54 |
1월, 목릉의 사토가 무너진 것으로 인하여 사직하다. ○ 3월, 출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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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2 | 1610 | 55 |
3월, 광해군 생모의 추승에 대해 논의하다. ○ 윤3월, 평안 북변에 기병을 둘 것을 청하다. ○ 9월, 잇달아 상차하여 사직을 청하니 사직은 허락하고 서북 지역의 수령 선발은 계속 행사하도록 명하다. ○ 10월, 서경덕의 종사(從祀)에 대해 수의하자, 그의 학문에 대하여 논하다. ○ 12월,공성왕후의 릉인 성릉의 봉성릉도감의 도제조에 제수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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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3 | 1611 | 56 |
2월, 14번이나 사직서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4월, 순옥의 추국에 위관(임시 재판장)으로 임명되다. ○ 정인홍을 청금록에서 삭제한 관학 유생과 임숙영의 삭과(급제취소)에 대해 상차하여 잘못됨을 논하다. ○ 8월, 우의정에 제수되다. ○ 12월, 정원에 차자를 올려 사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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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4 | 1612 | 57 |
2월, 출사하다. ○감직재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경세, 권필 등 사류를 위하여 변호하다. ○ 술사 이의신의 요언으로 천도설이 일어나자 논박하여 물리치다. ○ 정인홍의 일당인 이몽길이 상소하여 체찰부의 병권이 지나치게 중하다고 비판하자 상차하여 사직하다. ○ 11월, 정인홍이 상소하여 체찰부의 혁파를 청하니, 20여 번을 상차하여 훈련도감 도제조와 체찰사의 직을 사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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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5 | 1613 | 58 |
4월, 김제남의 옥사 때에 정협을 천거했던 일로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다. ○ 8월, 폐모론이 일어나자 대사헌 최유원을 통해 이를 배척하고, 직접 이덕형과 의논하여 반대 상소를 준비했으나 체직되어 올리지 못하다. ○ 10월, 이덕형이 양근에서 졸하자 가서 조문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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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6 | 1614 | 59 |
1월, 좌의정에서 체직되다. 대신 정인홍이 좌의정에 제수되다. ○ 동교(노원)에서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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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7 | 1615 | 60 |
윤8월, 아들 이성남이 역적에게 무고를 당하여 잡혀가자 홍인문 밖에서 대죄하다. 노원으로 돌아오다. ○ 11월, 양사에서 역적 정협을 천거한 일로 삭탈관작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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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8 | 1616 | 61 |
망우리에 동강정사를 짓고 이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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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9 | 1617 | 62 |
11월, 인목대비의 폐서인에 반대하는 헌의를 올리다. ○ 12월, 양사가 합사하여 절변에 위리안치(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하기를 청하자, 용강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가 다시 삼수로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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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 | 1618 | 63 |
1월, 북청으로 유배지가 정해져 유배길에 오르다. ○ 5월 13일, 북청의 유배지에서 졸하다. ○ 임금이 관작을 회복시키고 관례에 따라 예장할 것을 명하다. ○ 8월 4일, 포천의 선영에 장사 지내다. ○ 북청과 포천의 유생들이 사우를 세워 제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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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 | 1629 | - |
강릉에서 문집이 처음 간행되다. (江陵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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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8 | 1630 | - |
2월, ‘문충’의 시호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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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3 | 1635 | - |
진주에서 문집이 중간되다. (진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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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 | 1726 | - |
대구의 영남 감영에서 문집이 삼간되다. (영영신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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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전번역 종합DB, 백사집, http://www.itkc.or.kr(검색일 : 2019.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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