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5년 계축(1613) 8월 8일(계사)
영의정 이덕형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신이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환절기에 질병을 무겁게 앓아 신음하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조정에 늘어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불쌍히 여겼던 바였습니다. 이달 2일 밤에는 곽란(霍亂)이 매우 심하여 소명이 내렸는데도 달려가지 못함으로써 옥사의 국문이 지체되게 하였고, 지난 달에는 또 담궐(痰厥)을 앓아 기가 상승함으로써 육맥(六脈)이 막혀 어지럽고 의식이 없어 거의 인사불성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나랏일이 한창 급박한 시기에 신이 병에 걸려 출사를 못함으로써 심지어는 때맞추어 의논해서 아뢰어야 할 일까지도 나아가 올리지 못하였으니, 죄려가 더욱 커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의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시고 진귀한 조제를 하사해 주셨으니, 신은 더욱 감격하여 눈물만 흘린 채 무어라고 우러러 아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신은 불행하게도 총애와 영화가 분수를 넘으므로 재얼이 거듭 닥치고 있습니다. 지난 해 겨울에 차자로 진달한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초래한다.’고 한 것이 지금은 더욱 기승을 부려 온갖 병이 잇따라 발생하고 뭇 비방이 번갈아 모여들고 있으니, 몸이 죽고 정신이 사라짐에 성은을 보답하지 못하여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한 생각이 이를 때마다 저절로 눈물이 흐르곤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형편없지만 임금을 섬기는 가르침은 조금 알고 있습니다. 항상 스스로 기약하면서 힘썼던 것은 맹세코 용렬하고 비루한 사람이 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역적 이진(李珒)이 재신을 살해한 변고가 있었는데, 변양걸(邊良傑)과 유박(柳舶) 등이 옥사를 밝혀 도적을 체포하고자 하다가 서로 잇따라 형을 받아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온 조정이 모두 그들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묵묵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사사로운 혐의를 피하지 않고 차자로 그 진상을 진달드렸는데, 선왕의 성명한 조처를 입어 큰 견책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영경(柳永慶)이 국정을 오로지하면서 방자하게 굴었는데, 능을 범한 왜적을 거짓으로 데려다 처형하고서는 강화를 맺어 외교의 일을 그르쳤습니다. 신이 수백 마디의 의견을 올려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헤아렸는데, 유영경이 신에게 노여움을 품고 배척한 일이 많았습니다. 역적 이진과 유영경의 성세가 치열하던 날에 신이 상소를 올려 그의 원망을 받았던 것은, 조정에 있는 인사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엷음을 안타깝게 여겨서였지, 어찌 화복을 돌아보고 본심을 기만한 것이었겠습니까.
성명께서 즉위하시게 되어서는 더욱 무거운 은혜를 입었으니, 신의 아비가 노년에 재상의 반열에 갑자기 오르게 되었고 여러 자식들도 모두 벼슬에 통하였으며, 저 자신의 몸은 백관의 우두머리에 있고 이름은 훈부(勳府)의 맹약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성상의 은택을 입은 것이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비록 미미한 곤충이나 초목과 같은 신이라 하더라도 크나큰 은혜를 입은 것에 감격하여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만 배일 것입니다. 하물며 전에 없었던 변고를 만난 지금 친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상의 교지를 받들 때마다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여 침식을 모두 잊고 있으니, 한 번 죽어버리는 외에 다시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이의를 조처하는 일에 있어서 상께서 변고를 만나고도 인륜을 극진히 하신 점은 예전의 성현들보다도 훨씬 뛰어나셨습니다. 뭇 사람들의 마음이 막연해지면 질수록 성상의 유시는 더욱 간절하셨으니, 교서가 내려짐에 중외의 사람들이 누군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이의가 비록 강보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화근이 되고 있습니다. 역적 이진과 유영경이 벌을 받을 적에 모두 이의 때문이었다고 말하였으니, 이의가 흉악한 도적들의 기화가 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일입니다. 이의가 죽으면 화의 뿌리가 끊어져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며 이의가 죽지 않으면 인심이 흔들려 조정이 위태로울 것이니,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모두 속히 처단하고자 하는데 조정에 있는 재상들 또한 누군들 이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역모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이가 혹 차지 않았을 경우 법적으로 형을 시행할 수 없는데, 법은 왕이 삼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근을 제거하는 데 어찌 적절한 방법이 없겠습니까. 신과 여러 재상들이 감히 다른 논의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역적 이진의 변고는 다행히 완곡하게 보존해 주신 전하의 은혜에 힘입어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이 와서 조사할 때 시원하게 분변될 수 있었습니다. 신이 광녕(廣寧)에 이르렀을 때 무함하는 말이 시끄럽게 전파되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는데, 엄일괴와 만애민이 돌아와 보고하고서야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되어 무함하는 말이 저절로 깨뜨려졌으며, 성상의 덕은 보고하는 자문 가운데서 더욱 밝게 드러났습니다. 지금 또 광녕의 조사관이 머지않아 곧 나올 것인데, 데리고 오는 요좌(遼左)의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나라의 말을 알기 때문에 의외의 와전이 또한 심히 염려되었으며 주밀한 선처가 또한 잘못하는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망령된 생각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재상들과 함께 잠시 물러났던 것이니, 이는 대개 성상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따르느라 저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지나치게 염려한 것이었지, 쫓아냄에 곧 화의 뿌리를 끊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가 옥당의 차자를 보건대, 잇따라 배척을 가하며 역적을 놓아주어 임금을 위태롭게 한다는 죄로 지목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부터 모골이 송연하였습니다. 죄가 진실로 이와 같다면 천지간에 달아날 곳이 없을 것인데, 어찌 감히 조정의 반열에 얼굴을 다시 들 수 있겠습니까. 공의가 엄하고 엄하니 신은 죄를 받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가운데 내용에 대하여 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비록 때를 타고 힘을 겨루어 보위를 취하려 하던 자라 하더라도, 일단 명분이 갈라지고 백성들의 뜻이 결정되면 간악하게 넘보던 무리들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하물며 우리 성상께서는 춘궁을 잘 기르시어 선열들을 빛내고 계시며, 어진 명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지극한 다스림을 다투어 기대하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비록 서너 흉악한 역적이 있어 그 사이에서 화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하더라도 간악한 꾀가 발각될 것이니, 밝은 해가 중천에 뜨면 온갖 도깨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어찌 꼭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점을 지나치게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되겠습니까. 법망이 흉악한 무리들을 빠져나가게 할 경우 무리들을 불러모아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매번 큰 염려를 하는 일종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국은을 입었고 모두 이목이 있으니, 의분에 북받쳐 발언하는 것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뒤지겠습니까. 저 옥당의 논의가 비록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원근에 전해지자 인심이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육지(陸贄)가 여우처럼 의심하여 지나치게 방지하는 것을 깊이 경계한 것은 바로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아, 기축년 역변이 있은 이래로 양쪽이 붕당을 나누어 서로 배척하고 있는데, 역적을 다스려야 한다는 설과 역적을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설이 안에서 서로 싸우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도가 나날이 쇠퇴하여 이런 풍조가 점점 고질화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성명께서 위에 계시어 통촉하여 분명하게 결단하지 않으신다면, 뭇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모두 스스로 두려워할 것이니 대저 어찌 온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현재 인심이 나날이 더욱 흩어지고 조정은 나날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으며, 외구는 아침저녁으로 기어이 출동할 형세가 있는데 군사적 대비책은 터럭만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새는 배가 넓은 바다 가운데 떠 있으면서 노와 닻이 모두 부서졌는데도 편안하게 여기며 수리할 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거센 파도를 만난다면 장차 어느 곳에 닻을 내리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사람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조정에 이를 깊이 염려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으니, 피차 논쟁하는 것을 가지고 득책(得策)을 삼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워할 만합니다.
신은 약관의 나이에 벼슬에 올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34년째로 두 조정의 커다란 은택을 흠뻑 입었습니다. 일찍부터 조정의 온갖 폐단이 모두 사대부들이 붕당을 짓는 풍조에서 말미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의분에 북받쳐 스스로 생각하기를 ‘범순인(范純仁)이 「자신을 자책하는 데 있어서는 밝지 못할까 염려하고, 남을 책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너그럽지 못할까 염려하라.」고 했는데, 일반 관리들이 항상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힘쓰면서 또 붕우들을 꾸짖는다면 당쟁의 폐습은 자연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홍범(洪範)에서 또 말하기를 ‘일반인들이 지나치게 붕당을 짓는 일이 없고 관리들이 아첨하는 행위가 없는 것은 오직 제왕이 법도를 세웠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붕당을 제거하는 것은 임금이 법도를 세우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도를 세우는 요점은, 또한 경(敬)에 거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으로써 정치를 내는 본원을 밝혀, 일에 따라 대상에 따라 터럭만큼도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아서 뭇 아랫사람들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비곡절이 저절로 거울로 비추듯 저울로 단 듯 드러날 것이니, 누가 감히 시비로 현혹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충선(忠宣)의 경계로 충고하고 경연석상에 입시하게 되면 황극(皇極)의 뜻으로 위에 기대하였으니, 애태우던 신의 이 마음은 하늘의 해가 보아왔습니다. 신의 마음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가깝게 지내는 재상 반열의 후배들이나 대각의 명관들이 몇몇 있기는 합니다만,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절대로 신의 집에 이르는 자가 없었으며, 신 역시 비록 동료라 하더라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추대하는 바는 오직 성군이었고 걱정하는 바는 오직 직무였습니다. 자취를 외롭게 지니고 성격대로 행동하여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하면서 어리석음을 고치지 않았던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신이 생각해 낸 일이 모두 기롱을 받고, 충성을 바치려던 것이 도리어 죄안이 되었습니다. 기무를 검칙하고자 하면 제지를 받아 행해지지 않아 하나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작위나 부질없이 훔쳐 차지하고자 하면 누적되어 오던 흔단이 더욱 심해져 죄망(罪網)만 앉아서 불러들이므로, 유생들이 벌써 소를 올려 신을 배척하였고 대각이 또 양사의 완의석(完議席)에서 발론하였고 옥당이 잇따라 차자를 올려 또 극죄로 신을 배척하였습니다. 신이 이러한 때 염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터앉아 사퇴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랏일이 나날이 잘못되고 제 자신 역시 끝내는 큰 죄에 빠질 것입니다. 성상께서 오늘날 자상하게 고관에 거두어 주시는 은혜는 도리어 신의 훗날의 화를 보태는 것입니다. 지난 번 탑전에서 성상의 유시를 받들었는데 ‘어려움을 만나서 물러난다.’고 하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하늘이 너무 높고 해가 멀어서 신의 본정을 통촉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임진년 이래로 신이 사지도 마다않고 드나들었으며 뭇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곳에도 곧장 달려갔으니, 이를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편안한 곳을 사양하고 험난한 곳에 나아가며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을 급한 병으로 여겼으니, 이것이 신이 평소부터 지녀왔던 뜻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훗날 어려움이 있을 경우 미약한 목숨이 아직 남아 있다면 비록 죽어 구덩이에 뒹굴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 전하의 은혜에 죽음으로나마 보답할 것을 잊겠습니까.
아, 어려움은 나날이 심해지고 낭패 또한 지극하니, 신은 처신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영화와 총애를 탐하여 말없이 지내며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다가 시사가 신으로 말미암아 점점 무너져 후회해도 미칠 수 없게 된다면, 반드시 제 자신을 망치고 전하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현 형세를 깊이 헤아리고 또 신의 사정을 살펴 빨리 신의 죄과를 나열하여 직명을 먼저 파직하고, 재주와 인망이 한 세상을 복종시킬 수 있는 자를 뽑아 등용하여 진압함으로써 나랏일을 구제하소서. 이렇게 해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이 말은 한자 한자가 모두 진심에서 나온 정성으로, 만약 채택된다면 공사간에 거의 유익할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으레 하는 사퇴로 보지 마소서.”
하였다.
【이때 구신과 명사로서 조정에 근근히 용납받아 오던 자들이 모두 역당(逆黨)이라는 이유로 쫓겨나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덕형이 홀로 중망을 지녀 수상의 자리에 있었는데, 옥사를 국문하여 죄를 청하는 일에 있어서 힘껏 그때마다 참여하여 일에 따라 바로잡지 아니함이 없어 조그만 도움이나마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결정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 이견을 세우자니 큰 화를 입을 것 같았고 세속을 따르자니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술을 마시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백관이 정계함에 미쳐 삼사의 배척이 잇따르게 되자 비로소 상소하여 진정했는데, 말이 대부분 견강부회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했다.】
답하기를,
“나라의 위급함이 지난 번보다 더 심하니 나같이 혼미하고 열등한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다. 한밤 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항상 몹시 근심해 왔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고, 경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보통의 인정보다 월등함을 알았으니, 매우 가슴이 뭉클하다.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과 은혜를 온전히 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은 서로 모순없이 병행하는 것이니, 경의 의견 또한 옳다. 그러나 이의를 무신년의 일에 비기기까지 한 것은 옳지 않다. 그때 차관(差官)이 와서 조사한 일은 또한 나의 부덕한 소치였지만 참으로 예전에 없던 변고였으니, 부끄러움과 쓰라림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현재 인심이 각박하고 모지니 춘추의 의리를 아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내가 이미 신민들에게 덕택을 베풀지 못하고 신인(神人)에게 한갓 죄를 얻기만 하여 변고가 갖가지로 나타나니, 임금노릇 하는 게 즐겁지 않다. 떨리고 두려워 사태가 어느 곳에 이르게 될지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신하로서 후환을 염려하는 자들을 어떻게 깊이 꾸짖을 수 있겠는가. 나의 견해는 이와 같으니, 말 그대로만 가지고 뜻을 해치지는 말라. 경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빨리 출사해서 옥사를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출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O0_A05_08A_08A_00010_2005_011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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