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이항복이 존호를 올리는 일에 유영경이 엄폐했다는 것을 알지 못함을 아뢰다
"맨 처음 존호를 청하자고 의논할 적에 양사의 계사를 보니, 유영경이 엄폐했다는 등의 말이 있어서, 신이 좌의정 이덕형에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보니 ‘듣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덕형이 말하기를 ‘논공(論功)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나는 병으로 체직되어 그 뒤의 일은 들어서 아는 바가 없네. 그대는 원훈(元勳)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참여했으면서 어찌하여 내게 묻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빈청(賓廳)에 있으면서 이같은 기색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네.’라고 하였습니다.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고 했으니, 이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그의 집으로 찾아가 의논하니, 영경이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빈청에 이르러 뭇의논이 모두 같자 비로소 이에 따라서 그리 된 것인지 대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뒤 얼마 있다가 물의가 더욱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신에게 사사로이 묻기를 ‘빈청과 양사의 계사가 말이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신이 응답하기를 ‘한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은 한정되지만, 천하의 말은 끝이 없는 법이다. 같은 한마디 말이지만 들은 자도 있고 듣지 못한 자도 있는 것이니, 다르다고 한들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설령 영경이 이처럼 엄폐하였더라도 이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 되어 하늘의 큼에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성명(聖明)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저께 올린 양사의 계사를 보고, 신이 또 묻기를 ‘성난 목소리로 꾸짖어 좌절시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니, 덕형이 말하기를 ‘전혀 이런 일이 없다.’ 하고, 이어 대략 그 자초지종을 들어 아뢰었습니다만, 신은 끝까지 감히 이 한 조목을 계사에 두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덕형의 본뜻은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사실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감히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억지로 않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이른 새벽에 신이 혼자서 대궐에 다다르니, 덕형이 이에 대한 의논이 있다는 것을 듣고 감히 대궐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남과 더불어 일을 계획하다가 실패했는데도 홀로 죄를 면하는 것은 신이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신이 이미 덕형과 함께 이마를 맞대고 상의했었으면서 덕형은 죄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은 백관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음을 신이 알고 있습니다. 구구한 저의 의견이 비록 이와 같으나, 내일 나와보지 않기까지 한다면 이는 크게 물의를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압반(押班)086) 하여 정청(庭請)하는 일은 원임(原任) 대신이 있으며, 백관을 거느리는 일은 본부의 찬성(贊成)이 있으니, 간절히 빌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직을 체차하여 일의 체모를 온당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가 소요를 야기하여 경들이 제각기 불안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몹시 괴로워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지금의 이 정청은 원래 해야 할 일이 아니니, 경들은 출사하여 역옥(逆獄)을 다스리고 물러가 피하려는 계책을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38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6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인사(人事) / 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압반(押班)086) 압반(押班) : 조회할 때 반열을 거느리는 것.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5015_009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60A_0090_010_0030_2002_002_XML
○ 아뢰기를,
“존호(尊號) 청하기를 의논하던 처음에 양사(兩司)의 계사(啓辭)를 보니, 유영경(柳永慶)이 엄폐(掩蔽)했다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좌의정(左議政) 이덕형(李德馨)에게 묻기를,
‘당초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이덕형이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논공(論功)을 절반도 못 해서 나는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체직된 뒤로는 들어 아는 바가 없다. 공(公)은 원훈(元勳)으로 시종 함께 참여했으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묻는가?’ 하였습니다.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나는 빈청(賓廳)에 있으면서 이러한 기색(氣色)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고 했듯이 이 말이 나온 것도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혹 그때 어떤 사람이 사제(私第)로 가서 의논할 적에 유영경이 처음에는 난색(難色)을 지었다가 빈청에 가서 보니 군의(群議)가 다 같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따랐던 것이 아닌가? 아무튼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이윽고 물론(物論)이 더욱 거세게 나오자, 어떤 사람이 신에게 사적으로 묻기를,
‘빈청과 양사가 아뢴 말이 서로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한 사람이 듣고 본 것은 한계가 있고 천하의 말들은 끝이 없으므로, 똑같은 한 가지 말일지라도 들은 자도 있고 듣지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니, 서로 다른 것이 어찌 손상될 것 있겠는가. 설령 유영경이 이런 엄폐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려 보았자 넓고 큰 하늘이 되기에는 해롭지 않을 것이니, 성공(聖功)에야 무슨 손익(損益)이 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저께 양사에서 올린 계사를 보고는 신이 또 묻기를,
‘큰 소리로 거절했다는 것이 무엇을 이른 말인가?’ 하니, 이덕형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시말(始末)을 대략 계시(啓示)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혼자 마음 속으로
‘말을 내기란 본디 어려울 뿐더러 말을 전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는 사이에 본령(本領)은 모조리 없어지고 지엽(枝葉)만 점차로 무성해지기 때문에 말에 지엽이 있는 것을 성인(聖人)이 경계하셨으니, 끝내 감히 이 한 조항으로 계사의 전모를 논할 수 없다. 그 본의(本意)를 추구해 보면, 임금에게 사실대로 고하여 감히 듣지 않은 것을 억지로 조작해서 들은 것처럼 하지 못한 데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오늘날의 일은 존호를 올리는 것이 중요하니, 군신(群臣)이 의당 힘과 뜻을 서로 합하여 기필코 존호의 청을 얻어 낼 뿐입니다. 어찌 세쇄한 일을 가지고 따로 간격을 세워서 몸소 먼저 남과 의견을 달리하여 털끝만한 것을 다툴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결코 이러한 것을 부당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른 새벽에 신이 혼자 외로이 대궐에 나아갔는데, 이덕형은 이 의논이 있었음을 듣고 감히 대궐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남과 함께 일을 꾀했다가 일이 실패했을 때 혼자만 면하는 것은 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래서 신이 이덕형과 함께 이마를 맞대고 서로 의논하였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덕형은 대죄(待罪)를 하고 있으니, 신만이 백관(百官)을 거느리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닌 줄을 압니다. 신의 소견은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기 때문에 즉시 물러나오지 않고 뻔뻔스럽게 공당(公堂)에 있었던 데 대하여 미안함을 잘 압니다.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세도(世道)가 미루어 변천함에 따라 시비(是非)가 서로 혼동되는 것은 본디 쇠세(衰世)의 상사(常事)인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후세에 의심을 일으킬까 하는 염려까지 한다면 이는 끝없이 지나친 염려입니다. 그러니 유영경의 일에 대해서는 의당 후세의 말을 두려워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의심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오직 신이 이미 그와 함께 의논을 같이하고서 이런 낭패를 불러왔으니, 어리석은 소견은 설령 혹 이러하다 할지라도 명일 재차 옴에 이르러서는 물의(物議)를 공경하는 도리에 대단히 어긋납니다. 정청(庭請)을 압반(押班)하는 데에는 절로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있고, 백관(百官)을 규솔(糾率)하는 데에는 절로 본부(本府)의 찬성(贊成)이 있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직임을 허체(許遞)하시어 사체(事體)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에서 소요의 단서를 야기하여 경들을 각자 불안해하게 만들고 있으니, 내 마음이 매우 괴로워서 어떻게 비유하기도 어렵다. 지금 이 정청은 원래 할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 경은 나가서 역옥(逆獄)이나 다스리고 퇴손(退遜)할 계획은 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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