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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실록] 이항복 인물평, 사평 등

by Hhgj 2024. 3. 24.

* 본문에 없는 사평 제보 환영합니다.

 

『선조실록』

일자 기사 본문 링크
선조 28년 3월 7일 이항복·이덕형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해학을 잘했다. 반식(伴食)이나 하는 재상(宰相)은 되겠지만, 진실로 세상을 제도할 수 있는 인재는 아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803007_004
선조 28년 7월 10일 이조 판서 이항복이 명사 수행시의 거취에 대해 건의하다 성품이 큰소리 치기를 좋아하고 검속(檢束)하는 데에 구애받지 않아 마치 세상을 완롱(玩弄)하는 듯한 태도를 지녀 당시 여론이 병통으로 여겼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03001_005
선조 30년 3월 1일 이항복 등 7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해학이 너무 지나쳤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7_002
선조 33년 6월 17일 이항복을 영의정으로, 이헌국을 좌의정으로, 김명원을 우의정으로 삼다 해학을 일삼았기 때문에 마치 세상을 하찮게 여기며 즐기는 사람 같았다 정승 자리에 앉아서는 건의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4020_001
선조 34년 2월 11일 영의정 이항복이 네 번째 정사하다 학술은 없고 해학을 잘 하였는데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402011_003
 선조 34년 7월 20일 영의정 이항복이 출사하다 이항복은 재상이 된 이래 시대에 부침(浮沈)하여 아첨하며 건백(建白)한 바가 없어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으나 송영구(宋英耉)로부터 논박을 받은 뒤에 물러갈 것을 결심하였는데, 상께서 재삼 권유하자 억지로 나온 것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407020_001
선조 35년 4월 20일 서천군 정곤수가 이항복을 출사케하도록 아뢰다 해학을 잘할 뿐 건백(建白)하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신축년에 상이 여러 신하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호종 공신의 책봉을 명했는데 항복을 수훈(首勳)으로 삼았다. 그러나 송언신(宋言愼)·박이장(朴而章) 등이 상의 앞에서 간당으로 지목하며 심히 배척하자 항복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705016_004
선조 37년 4월 24일 영의정 이항복이 영의정직을 세 번째 사양하다 이항복의 세 차례 사직 차자는 한결같이 간당을 들어 자핵한 것인데, 분격해 하는 기색이 언외(言外)에 넘쳐 신하된 사람이 임금에게 진언하는 말이 아닌 듯하고, 조어도 현저하게 간신 정철을 영구(營救)하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니 지난날 필마로 서쪽 교외에 나가 술잔을 들며 작별했던 심정을 혹 잊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닐까. 또한 ‘봉장(封章)을 먼저 올렸기 때문에 미처 말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변양걸(邊良傑)의 일에 있어서는 과연 그렇지만, 송순(宋諄)이 떠날 적에도 봉장을 올린 뒤이었던가. 어찌 그리도 말을 늦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신이 일찍이 듣건대, 기축년에 간신 정철이 밀계(密啓)하기를 ‘적도들의 말에 「호남의 목을 누르고 해서(海西)의 입구를 막아버리고서 의병(義兵)이 영남에서 일어나면 국가의 형세는 위태롭게 된다. 」고 하였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런 말을 알고 있는 자는 그 모의에 참여한 것이다. 누가 한 말인가?’ 하자, 정철이 아뢰기를 ‘이항복이 한 말입니다.’라고 했었다 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704024_003
선조 37년 5월 15일  영의정 이항복의 여섯 번째 정사에 본직을 체면한다고 유시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항복은 임금의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고 임금의 녹을 먹은 것이 오래였는데도 위급하여 존망이 경각에 달린 때에 보답할 계책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번거롭게 정고(呈告)만 하면서 오히려 빨리 떠나지 못할까 염려하여 기필코 체면되어 자신의 뜻을 이루었으니, 자신을 위한 계책은 잘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어찌 되겠는가. 박절함이 또한 너무도 심하다. 아, 옛적의 대신들은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 하고 사직(社稷)의 안위를 책임졌으며, 자신의 성패(成敗)와 사생(死生)은 돌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신들은 국가의 일을 길가는 사람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니, 뒷날 국사가 뒤흔들려 진정할 수 없게 된다면 감히 집에 있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705015_003
선조 37년 5월 16일 이항복을 오성 부원군으로 봉하고, 이기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항복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맹부(盟府)의 이른바 평난 공신(平難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으니, 마음이 편안하게 되었다고 하겠으며, 또한 스스로 세상과 끊고 하늘의 조화(造化)에 따라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음을 알 것인가.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705016_004
선조 39년 1월 22일 이덕형과 이항복의 전력  본문 참고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901022_002
선조 40년 4월 14일 종묘 제도에 대해 대신들이 의논드리다 우스개소리 하기를 좋아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4004014_003

 

『선조수정실록』

일자 기사 본문 링크
선조 18년 9월 1일 이항복을 정언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이조 좌랑으로 옮기다 항복은 재기(材器)가 남보다 뛰어나 상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이발(李潑) 등이 시기하였으나 배척하지 못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1809001_004
선조 21년 12월 1일 오억령·이호민·이항복·이덕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때의 명사(名士)는 모두 시론(時論)의 완급(緩急)을 가지고 품평하여, 논의를 달리하는 자는 죄를 얻고 자신을 지키는 자는 명망이 없었다. 그런데 이항복·이덕형 등은 특별히 문장이 뛰어나고 재주가 영리하였으므로 상의 권우(眷遇)를 받아 사람들이 감히 논하지 못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112001_001
 선조 23년 8월 1일 이항복을 동부승지에 제수하다 이항복을 직제학으로 삼았다가 곧 초탁하여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항복이 이조 정랑으로 추국청 문사낭관이었는데 선조(宣祖)가 죄수를 친국할 때 항복이 응대를 민첩하게 하고 보고 듣고 묻고 쓰면서 말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거침없이 써 내려갔으므로 옆에서 본 사람들이 신묘하게 여겼다. 상이 이 점을 기특하게 여겨 중죄인을 심리할 때마다 기록을 담당하게 했는데, 항복이 내용을 살펴 힘써 죄수를 살리는 의견을 내었다. 이로 인해 차례를 뛰어넘어 근시(近侍)에 제수되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308001_002
선조 24년 윤3월 1일 도승지 이항복을 파직시키다 도승지 이항복을 파직시켰다. 항복이 성지를 받들어 정철의 죄상의 대해 방을 내걸 적에 윤색을 하지 않고 전교한 말만 기록하였다. 그러자 헌부에서 항복이 성지를 저지하였다고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403101_005
선조 25년 5월 1일 호종한 신하들에게 직질을 차등있게 올리도록 명하다 "이조 참판 이항복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으며 물외(物外)에 초연한 인물이니, 위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크게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떻게 자급(資級) 때문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판서에 궐원이 생기면 발탁해서 보임하거나 다른 중책을 맡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알라"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13
선조 28년 2월 1일 이기가 이조 참판이 되고 이항복은 이조 판서 겸 대제학이 되다 이항복은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충심으로 애쓰는 모습이 현저하게 드러나 임금의 총애가 특별히 두터웠다. 그리고 기국이 크고 당론(黨論)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지목을 받는 일은 있어도 공격은 받지 않았으며, 다섯 번이나 병조 판서를 역임했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802001_003
선조 33년 1월 1일 좌의정 이항복을 도체찰사 겸 도원수로 삼다 슬프다. 군소배(郡小輩)들이 허위를 날조하여 모함하는 말이 어찌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항복은 기축년 옥사 때 매번 죄를 논할 즈음에 이리저리 주선하여 그 덕에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또 항복이 지은 《기축기사(己丑記事)》를 보면 더욱 항복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데도 참독하다고 하였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3301001_002
선조 37년 4월 1일 이항복을 영의정으로 삼았으나 간당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여 사양하다 본문 참고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3704001_001
선조 39년 1월 1일 이덕형과 이항복을 기록한 《실록》에 대한 사평 본문 참고
(  
선조실록  선조 39년 1월 22일 기사
'이덕형과 이항복의 전력'을 반박하는 내용)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3901001_003


『광해군일기중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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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즉위년 5월 4일 이항복을 좌의정으로 삼다 항복은 풍골(風骨)과 기절(氣節)이 있으며 문자를 잘해서 그 당시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선종(宣宗) 말년에 시사(時事)가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고상한 담론이나 하며 세상일에 신경쓰지 않아 진 국공(晉國公) 배도(裵度) 같이 세속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지낸다는 비방을 받았는데, 결국에는 정철(鄭澈)의 당으로 군소배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광해 1년 12월 30일 친제와 망궐례의 중복에 대해 좌의정 이항복이 건의하다 사람됨이 체격이 크고 훤칠하며 풍도(風度)와 기국(器局)이 참으로 재상감이었다. 넓은 아량을 지녀 규각(圭角)이 드러나지 않으며 청표(淸標)와 덕망(德望)이 세상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었다. 정승에서 체임된 뒤 6, 7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면서 출입을 끊고 날마다 과정(課程)을 정하여 독서하였으므로 문장과 식견이 그전보다 월등해졌다. 일찍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어서는 무사(武士)로 적체된 자에 대하여 그 재주를 시험해서 차례로 뽑아 기용하면서 개인적인 부탁은 따라주지 않았으므로 공도(公道)가 크게 넓혀졌기에 근래의 병조 판서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청탁하고 관절(關節)하는 것이 오늘날 진신(搢紳) 사이의 고질화한 폐단인데 혼자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감히 개인적인 일을 구하지 못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좌상에게 덕을 입은 적이 없다는 말이 당시에 떠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너그러웠고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시의(時議)와 부침(浮浸)하고 순례적으로만 봉공(奉公)하면서 자신의 역량과 재주로도 오히려 국사(國事)를 떠맡지 않았으므로 더러는 녹봉만 지키며 숫자나 채우는 신하에 가깝게 여겼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오늘날에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형세임을 깊이 알았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귀(李貴)에게 장난으로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나와 그대는 도(道)가 각기 다르니, 공자는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감추고, 그대는 써줘도 행하고 버려도 행하고, 나는 써줘도 감추고 버려도 감춘다." 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광해 2년 12월 27일 이항복이 체직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다 사신은 논한다. 이항복은 〈넓은 도량과 큰 덕망을 가지고 있으며〉 청렴 결백으로 내면을 바로잡고 문장의 화려함으로 밖을 수식한 것으로써 선조(先朝) 때부터 온 세상의 으뜸이 되어왔다. 그래서 오늘날의 어진 재상을 말할 때면 반드시 항복을 꼽곤 하였다. 왕이 처음 즉위하던 때에 그를 재상으로 세웠으며, 〈두 번씩이나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 두어 백관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고〉 사방의 군사를 전담하게 하였으니, 안팎의 중대한 임무를 맡아 〈국가의 안위(安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자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항복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능과 덕이 안을 닦고 외부의 침략을 물리칠 만하다고 판단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며 온갖 노력을 다할 것만을 생각하여 알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을 죽을 때까지 계속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큰 은혜에 보답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재능과 덕이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을 알았다면 당장에 몸을 이끌고 물러감으로써 대신이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온전히 했어야 한다. 항복이 의정(議政)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 2년이 된 지금, 임금의 덕은 날로 어그러져가고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지며, 변방의 근심은 날로 어려워져가고 백성의 곤궁은 날로 깊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항복은 일에 임하여서는 뒷걸음질치며 한마디 말을 하여 임금을 바로잡거나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아 나라를 보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묘당이 드린 의논은 한바탕 부질없는 해학이 되어 세속의 웃음거리가 되곤 하였다. 〈신은 그의 재능과 덕이 큰일을 해내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하지 않은 것인지를 알 수 없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것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갈 줄 모른 것은 둘 다 옳지 않은 일이다. 항복은 반드시 이 가운데 어느 경우엔가 해당될 것이다.〉 또 〈명정(明庭)에서 인재를 뽑는 데에〉 명을 받들어 임하게 되었으면 〈나라를 위해 인재를 얻는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었던 것인가.〉 부정을 행하는 작태를 보고도 바로잡아 처벌하여 국가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지 못하고, 손을 놓은 채 구차하게 동의하여 끝내 그 간사한 짓을 하게 버려둠으로써 〈2백 년 전례에 없는 과거를 치르게 하여 조정에 수치를 남겼다.〉 공론이 나오고 난 뒤에도 또 과감히 간사한 작태를 바로 지적하여 비리를 바로잡지 못하고, 뒤이어 변명을 늘어놓아 왜곡되게 한 두 사람을 비호하려 하였으니, 군자의 마음은 처사가 광명 정직하다는 것으로 그를 일러 말할 수 있을까. 〈다만 인격이 남보다 낫고 절개를 바꾸지 않아〉 장상(將相)의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집이 가난하여 텅 비었고, 막중한 권세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대문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손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훌륭한 명성이 완전히 추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을 함께 했던 배 상국(裵相國)168) 에게 그를 비교하기도 한다.〉
광해 10년 5월 13일 전 영의정 오성 부원군 이항복의 졸기 전 영의정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이 노졸(老卒)하였음. 앞서 17일에 있었는데, 이곳 없는 곳에 고출(考出)할 것.
광해 10년 5월 17일 전 영의정 오성 부원군 이항복의 졸기 〈전 영의정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 유배지에서 죽었다.〉
광해 12년 9월 13일 사간원에서 이성구와 현즙·인천 현감 한급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구만 파직시키다 항복은 〈일국의 촉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던 숙덕(宿德)으로서〉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었는데 흉도들의 유일한 시기의 대상이었고, 〈세상에서는 그를 태산교악처럼 여겨 모두 오성 상공(鰲城相公)이라고 불렀지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폐모론 수의(收議)가 있던 날 바른 말로 간했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갔다. 〈그때 그 사실을 바로 지적한 봉사(封事)에 대하여 사람들 모두가 무릎을 치며 탄복하기를 ‘오성이 과연 그 일을 해냈구나.’ 하면서 길거리마다 감탄하는 소리였고, 급기야 귀양을 가게 되자〉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여유있게 길을 떠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죽자 북청과 포천에서 모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던 것인데, 묵은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던 흉도들이 지금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즙은 종전부터 궁액(宮掖)과 서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아뢴 내용대로 따르지 않고 성구만이 죄를 얻고 〈돌아오지 못했다. 이 세 사람들이 했던 일은 천고에 빛나고 있고 정사년에 세웠던 절의는 그 중에서도 더더욱 돋보이는 일이었는데 흉도들이 이렇게까지 깎아내리고 있으니, 이따위 인간들에게 무엇을 또 나무랄 것인가〉

 

『광해군일기정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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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즉위년 5월 4일 이항복을 좌의정으로 삼다 항복은 풍골(風骨)과 기절(氣節)이 있으며 문자를 잘해서 그 당시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선종(宣宗) 말년에 시사(時事)가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고상한 담론이나 하며 세상일에 신경쓰지 않아 진 국공(晉國公) 배도(裵度) 같이 세속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지낸다는 비방을 받았는데, 결국에는 정철(鄭澈)의 당으로 군소배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0005004_002
광해 1년 12월 30일 친제와 망궐례의 중복에 대해 좌의정 이항복이 건의하다 사람됨이 체격이 크고 훤칠하며 풍도(風度)와 기국(器局)이 참으로 재상감이었다. 넓은 아량을 지녀 규각(圭角)이 드러나지 않으며 청표(淸標)와 덕망(德望)이 세상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었다. 정승에서 체임된 뒤 6, 7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면서 출입을 끊고 날마다 과정(課程)을 정하여 독서하였으므로 문장과 식견이 그전보다 월등해졌다. 일찍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어서는 무사(武士)로 적체된 자에 대하여 그 재주를 시험해서 차례로 뽑아 기용하면서 개인적인 부탁은 따라주지 않았으므로 공도(公道)가 크게 넓혀졌기에 근래의 병조 판서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청탁하고 관절(關節)하는 것이 오늘날 진신(搢紳) 사이의 고질화한 폐단인데 혼자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감히 개인적인 일을 구하지 못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좌상에게 덕을 입은 적이 없다는 말이 당시에 떠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너그러웠고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시의(時議)와 부침(浮浸)하고 순례적으로만 봉공(奉公)하면서 자신의 역량과 재주로도 오히려 국사(國事)를 떠맡지 않았으므로 더러는 녹봉만 지키며 숫자나 채우는 신하에 가깝게 여겼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오늘날에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형세임을 깊이 알았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귀(李貴)에게 장난으로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나와 그대는 도(道)가 각기 다르니, 공자는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감추고, 그대는 써줘도 행하고 버려도 행하고, 나는 써줘도 감추고 버려도 감춘다." 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0112030_002
광해 2년 12월 27일 이항복이 체직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다 사신은 논한다. 이항복은 청렴 결백으로 내면을 바로잡고 문장의 화려함으로 밖을 수식한 것으로써 선조(先朝) 때부터 온 세상의 으뜸이 되어왔다. 그래서 오늘날의 어진 재상을 말할 때면 반드시 항복을 꼽곤 하였다. 왕이 처음 즉위하던 때에 그를 재상으로 세웠으며, 사방의 군사를 전담하게 하였으니, 안팎의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 그렇다면 항복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능과 덕이 안을 닦고 외부의 침략을 물리칠 만하다고 판단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며 온갖 노력을 다할 것만을 생각하여 알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을 죽을 때까지 계속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큰 은혜에 보답했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재능과 덕이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을 알았다면 당장에 몸을 이끌고 물러감으로써 대신이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온전히 했어야 한다. 항복이 의정(議政)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 2년이 된 지금, 임금의 덕은 날로 어그러져가고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지며, 변방의 근심은 날로 어려워져가고 백성의 곤궁은 날로 깊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항복은 일에 임하여서는 뒷걸음질치며 한마디 말을 하여 임금을 바로잡거나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아 나라를 보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묘당이 드린 의논은 한바탕 부질없는 해학이 되어 세속의 웃음거리가 되곤 하였다. 또 명을 받들어 임하게 되어서 부정을 행하는 작태를 보고도 바로잡아 처벌하여 국가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지 못하고, 손을 놓은 채 구차하게 동의하여 끝내 그 간사한 짓을 하게 버려두었다. 공론이 나오고 난 뒤에도 또 과감히 간사한 작태를 바로 지적하여 비리를 바로잡지 못하고, 뒤이어 변명을 늘어놓아 왜곡되게 한 두 사람을 비호하려 하였으니, 군자의 마음은 처사가 광명 정직하다는 것으로 그를 일러 말할 수 있을까. 장상(將相)의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집이 가난하여 텅 비었고, 막중한 권세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대문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손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훌륭한 명성이 완전히 추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0212027_004
광해 10년 5월 13일 전 영의정 오성 부원군 이항복의 졸기 전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유배지에서 졸하였다. 이항복은 호상(豪爽)하고 풍도(風度)가 있어 어려서부터 이덕형(李德馨)과 명성을 더불었으며, 과거에도 함께 합격했다. 문학으로 현달하여 정철(鄭澈)과 항상 기린과 봉황에 비유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병조참판으로 발탁되는데 이르렀고, 공로가 가장 컸다. 평생 청탁하는 글을 짓지 않았으며 뇌물을 받지 않았는데 지위가 재상에 있으면서도 집안은 가난하여 한사(寒士)와 같았다. 무신년(1608년) 초정(初政)에 민간에는 임해군(臨海君)이 변을 일으키고 조정이 먼저 움직여 이덕형 또한 처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항복만이 진중하게 뇌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훈련도감 도제조였는데 혹자는 그에게 은밀히 군사 대비를 명령하라고 권하였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그 후 일찌기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伸冤)되는 때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그는 편당을 주장하지 않았는데도 세류를 따르다 화를 만났으니 사론 중 혹자는 그의 익살과 구용(苟容)을 그 원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론(大論)을 수의(收議)할 때에는 마침 교외에서 대죄할 때이고 국사를 듣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의견을 적어 내는데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큰 절개를 빼앗을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1005013_006
광해 12년 9월 13일 사간원에서 이성구와 현즙·인천 현감 한급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구만 파직시키다 이항복과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은 모두 선조조(宣祖朝)의 대신들이다. 폐주(廢主) 초기에 백성들의 신망을 걸머지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계축년 옥사때 덕형은 의분에 북받쳐 할말을 다하다가 불측의 죄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걱정 끝에 죽었으며, 정조와 윤인이 폐모론을 들고 나왔을 때 원익이 맨 먼저 차자를 올렸었는데, 그때 폐주(廢主)는 그를 미친 소리라고 하고 홍천(洪川)으로 내쫓았다. 항복은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었는데 흉도들의 유일한 시기의 대상이었고, 폐모론 수의(收議)가 있던 날 바른 말로 간했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갔다.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여유있게 길을 떠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죽자 북청과 포천에서 모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셨던 것인데, 묵은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던 흉도들이 지금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1209013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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