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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실록] 이덕형 인물평, 사평 등

by Hhgj 2024. 3. 24.

* 본문에 없는 사평 제보 환영합니다.

 

『선조실록』

일자 기사 본문 링크
선조 26년 7월 13일 비변사의 요청으로 황정욱이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잡아 올리기로 하다 사람됨이 본래 재주가 있어서 약관(弱冠)에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오로지 아첨하여 비위 맞추기만을 일삼으니 상이 전적으로 신임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3_007
선조 26년 9월 5일 제독 접반사 이덕형이 찰원에게 남쪽 왜적의 섬멸을 청할 일로 보고하다 이덕형(李德馨)은 약관(弱冠)에 수재(秀才)로 등용되었다.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09005_007
선조 26년 11월 2일 영의정 유성룡이 세자가 남으로 가는 일에 대해 아뢰다 천품이 수미(粹美)하고 재기(才器)가 숙성했으며, 또 글을 잘하여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02_003
선조 26년 11월 10일 이덕형·김늑·이덕열·홍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덕형은 젊은 나이에 발탁되었는데 재예(才藝)가 남들보다 뛰어났으나 모릉(摸稜)533) 에 익숙하여 조금도 강직한 기풍이 없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611010_004
선조 27년 11월 15일 이조 판서 이덕형이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다 본문 참고
(기복출사한 이덕형을 비판하는 내용)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711015_004
선조 28년 1월 10일 주강에 《주역》을 강하다. 정탁 등이 기축 옥사의 원왕을 풀 것 등을 청하다 이덕형이 자신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을 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801010_001
선조 31년 4월 26일 우의정 이덕형이 연소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다 젊은 시절 재화(才華)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으나 임진 왜란을 당하여 서쪽으로 파천했을 때 군소배(群少輩)들과 어울려 예절을 상실하였고, 또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하였는데 모든 일들이 보탬은 없고 해만 있었다. 일찍이 중국 장수의 접반관으로 있으면서 통진(通津) 쌀 1백 석을 어디에다 쓰는 양 통첩을 하고 통진으로 달려가 관가가 비어있는 시기를 이용하여 쌀 1백 석을 자기의 고을 농사(農舍)로 보냈었는데, 아전들이 붙들고 울면서 뒤에 오는 수령은 무엇을 먹을 것이냐고 호소하였으나 들은 체도 아니하고 공공연히 싣고 갔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104026_002
선조 32년 2월 10일 좌의정 이덕형이 중국 장수들이 왜적들과 몰래 통하고 있음을 아뢰다 덕형은 나이가 40이 되기 전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니 어찌 영화가 아니겠는가. 다만 국가가 어려운 때를 만나 군주의 융숭한 대우를 믿어 자신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헤아리지 않고 사무를 담당하려고 하였는데 작은 그릇은 채워지기 쉽고 짧은 재주는 바닥나기 쉬우므로 일처리를 할 때 실패가 많으니 정승의 일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겠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202010_003
선조 32년 8월 28일 관직에서 물러난 좌상을 다시 등용하는 일을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케 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은 나이도 젊고 재주도 있으며 지위가 높고 책임도 중하였다. 만약 정성을 다해 봉직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않았다면 그의 힘이 미치는 일은 보익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조그마한 혐의로 인해 강력히 병을 핑계하면서 끝내 일을 보지 않음으로써 주상으로 하여금 홀로 사직(社稷)의 걱정을 맡게 하였으니, 자못 대신은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 한다는 의리가 없는 처사이다. 경리가 준엄히 책망한 것은 당연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208028_010
선조 33년 1월 29일 윤두수의 간궤함과 이덕형의 탐오함을 들어 비판하는 사평 본문 참고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301029_005
선조 33년 3월 4일 판중추부사 이덕형이 사직소를 올리다 사신은 논한다. 덕형은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성화(聲華)가 대단하였고 문사(文詞)가 찬란하였다. 따라서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쳐 검은 머리에 태정(台鼎)105) 이 되었으니, 보기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아(姻婭) 관계의 사정(私情)으로 이경전(李慶全)이 경망스러운 줄 알면서도 힘을 다하여 행여 노칠세라 끌어 들였다. 그런데 경전이 사로(仕路)를 얻고 나서는 도리어 덕형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창황히 병을 끌어대면서 온정(溫井)에 간다고 칭탁하였으니, 어찌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어진 정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303004_001
선조 33년 11월 25일 판중추부사 이덕형에게 《무경요람》을 내리며 군사 문제를 당부하다 덕형은 경륜(經綸) 절충(折衝)의 재주와 감언(敢言) 항론(抗論)의 실상은 없었으나 특별히 문장과 사기(辭氣)로 한때의 중망을 얻었다. 나이 37세에 이조 판서·병조 판서·대제학을 지내고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이렇게 갑자기 승진된 자는 일찍이 없었다. 유 독부(劉督府)에 있는 항왜(降倭)를 임의로 머물러 둔 일 때문에 임금의 돌봄이 조금 소홀해져 정승의 지위에서 물러났고 훈련 도감 제조도 파직되었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 대한 기미책(羈縻策)을 제정하여 올리자 자주 등대(登對)하라는 언지를 내렸으며 그의 말이 상의 뜻에 맞으니 상이 매우 좋아하였다. 사람됨이 막상 일에 임하면 자질구레하여 큰 줄거리를 세우지 못하는 데다가 청절(淸節)에 힘쓰지 않으니 사람들이 욕심장이라고 기롱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311025_003
선조 34년 4월 18일 체찰사 이덕형이 권농과 군사 훈련 문제에 대해 치계하다 재기(才氣)가 출중하니 젊은 나이에 재상이 된 것은 요행이 라기보다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있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404018_005
선조 34년 7월 4일 도체찰사 이덕형이 왜적의 일에 대처할 방안에 대해 아뢰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은 체찰사라는 중신(重臣)의 신분으로서 제대로 나라의 위엄을 보여 적으로 하여금 두려워 복종하게 하지는 못하고, 도망병의 힘을 빌어 적을 속일 계책까지 하였으니, 어찌 교활한 왜적을 속일 수 있겠는가. 그의 계책을 행함이 소루하고도 어리석다 하겠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407004_004
선조 35년 2월 30일 이덕형이 해조의 담당아전 등의 추고를 청하다 사신은 논한다. 본국의 서리(胥吏)의 폐단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명종조의 처사 조식(曺植)이 그 폐단을 극력 말하여 ‘나라를 망치는 것이 반드시 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였으니, 어찌 본 바가 없이 그렇게 말하였겠는가. 이것이 비록 한 가지 사례이나 그 나라를 좀먹는 형상은 하나 뿐이 아니니, 이는 모두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덕형은 난리 뒤에 어미 상을 만나 기복(起復)해서 이조 판서가 되어 흑천릭[黑天益]을 입고 공공연하게 정청(政廳)에 출입하였고, 훈련 도감 당상이 되어서는 날마다 훈련 도감의 쌀과 포목을 가져다가 사용하였다. 그 아비가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있을 때는 이덕형이 공명고신(空名告身) 1백여 장을 내어 문화 현령 지방에 몰래 팔아서 수백 마리의 소를 사들여 통진(通津)의 농장(農庄)에 두었다. 또 그 아비가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체직된 뒤에는 경리 접반사(經理接伴使)가 되어 통진현의 쌀1백여 석을 취용(取用)하는 것처럼 공문을 내어 공공연히 현의 쌀 1백여 석을 농장에 실어보냈다.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사람으로 사리(私利)를 경영하고 나라를 좀먹는 짓을 끝없이 했는데 체찰사의 중임을 함부로 받았으니, 서리가 나라를 좀먹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 무슨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502030_001
선조 35년 7월 22일 《주역》을 강하면서 이덕형·성영이 그 뜻과 대체를 자세히 설명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과 성영이 아뢴 경우는 일에 따라 간언을 드린 것으로 임금에게 고하는 대체(大體)를 깊이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따라서 임금이 진실로 기꺼워하며 근본을 돌이켜 보고 그 말을 따라 고칠 수만 있었다면 중흥하는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진한 점이 있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507022_001
선조 35년 8월 20일 나덕명·송의·황효길 등 왜적과 화합한 인물들을 석방하다 당시 추관(推官)들은 의옥이 해결된 것만 다행으로 여긴 나머지 고변자를 죄주자는 청은 감히 한 마디도 내놓지 못했는데,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석방할 자를 방송(放送)할 때 경우 등은 맨 나중에 칼을 벗겨 조금이라도 분을 풀어야겠다.’고 했다 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508020_001
선조 36년 7월 23일 《주역》 진괘를 강하고 왜와 통호하는 일을 의논하다 사신은 논한다. 옛말에 ‘상줄 때에는 공이 따르는 자를 빠뜨리지 않는다.’ 하였다. 대저 공로를 보답하는 상전(賞典)은 헛되이 줄 수도 없고 헛되이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덕형은 대가(大駕)가 난을 피하여 서울을 떠날 때에 궐문(闕門)에서부터는 수행하지 못하였고 여러 날 뒤에야 뒤미처 이르렀는데, 뒤미처 이른 것을 호종이라 한다면 온 조정이 다 호종한 것으로 어찌 이덕형 한 사람뿐이겠는가. 호종과 왜적을 정벌한 일에 다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여 참여하려 하지 않으니, 자신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607023_001
선조 37년 2월 26일 의정부 영의정 이덕형이 자신의 녹훈 삭제를 요청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의 이 차자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데에 밝은 것이라 하겠다. 대저 녹공은 국가의 막대한 일이라 윗사람도 사정(私情)에 따라 부당하게 수록할 수 없는 것이고 아랫사람도 공로가 없는데 거짓되이 수록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거짓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덕형은 자신이 재상 반열에 있으면서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을 때 서울에서부터 호종하여 임금의 파천에 함께하지 못하였고 또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없애지도 못하였으니, 의거할 만한 공로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데도 수록된다면 사정에 따라 부당하게 수록되고 공로가 없는데 거짓되이 수록되는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한때의 시비는 혹 정해지지 않을지라도 천하 후세의 공론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이덕형이 말하지 않으려 하여도 그럴 수 있겠는가.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702026_002
선조 37년 3월 27일 임금이 변양걸과 유일을 처리한 경위와 대신들에 대한 불만을 말하다 본문 참고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703027_003
선조 37년 10월 23일 효경전의 신주를 고쳐 쓰는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덕형은 젊은 나이에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검은 머리에 정승이 되었으나 강직한 절조가 없는 것을 사람들이 간혹 비난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710023_001
선조 40년 4월 14일 종묘 제도에 대해 대신들이 의논드리다 과단성이 부족하여 정승이 되어서도 건백한 것이 없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4004014_003
선조 39년 1월 22일 이덕형과 이항복의 전력 본문 참고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901022_002

 

『선조수정실록』

일자 기사 본문 링크
선조 21년 12월 1일 오억령·이호민·이항복·이덕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때의 명사(名士)는 모두 시론(時論)의 완급(緩急)을 가지고 품평하여, 논의를 달리하는 자는 죄를 얻고 자신을 지키는 자는 명망이 없었다. 그런데 이항복·이덕형 등은 특별히 문장이 뛰어나고 재주가 영리하였으므로 상의 권우(眷遇)를 받아 사람들이 감히 논하지 못하였다. 오억령·유근 등은 모두 문명으로 현요직(顯要職)에 올랐고 홍인상(洪麟祥)도 경학(經學)으로 지우(知遇)를 받았다. 이 몇몇 사람은 당시 명류(名流)에 들어 있었으나 구차히 당에 아첨하여 진출하기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공론이 칭찬하였다.
선조 23년 9월 1일 이산보를 직제학에 제수하다 덕형은 유전(柳㙉)의 조카이고 이산해(李山海)의 사위라는 혐의가 있어 관각(館閣)의 청반(淸班)에 오르는 데 지장이 많았는데, 이때 와서 사신 접대를 상의 뜻에 맞게 하고 왜인이 경복(敬服)하였으므로 차례를 뛰어 제수되니 명망이 더욱 빛났다.
선조 24년 8월 1일 이덕형을 예조 참판 겸 양관 대제학으로 삼다 덕형은 문장이 가장 우수하여 대신들이 문형에 알맞다고 많이들 추천했기 때문에 상이 먼저 품계를 2품으로 올렸는데, 이때 나이 31세였다.
선조 25년 4월 14일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을 왜군에 사신으로 보내다 그 뒤에 유언비어가 횡행하였는데 ‘왜(倭)가 장차 덕형을 강제로 옹립하여 왕을 삼고, 김성일을 정승으로 삼을 것이다’ 하여 원근(遠近)에 이 소문이 전파되면서 인심이 미혹되었는데, 북도(北道)의 군사와 백성들이 더욱 믿었으니 당시 국가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선조 39년 1월 1일 이덕형과 이항복을 기록한 《실록》에 대한 사평 본문 참고
(
선조실록 선조 39년 1월 22일 기사
'이덕형과 이항복의 전력'을 반박하는 내용)

 

『광해군일기중초본』

 

일자 제목 본문 링크
광해 1년 11월 25일 영의정 이덕형이 돌아와 평택·직산·아산·신창·예산 등지의 상황을 보고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덕형이 진달한 바가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하교한 바도 엄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건마는, 끝내 착실하게 거행되지 않았으니 어째서인가. 상하의 말이 한갓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광해 2년 3월 22일 영의정 이덕형이 사직을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 사신은 논한다. 임금의 직책은 정승을 잘 선택하는 데 있다. 지금의 삼공(三公)은 성상께서 지극히 엄선하였고 명망도 흡족한데 상하가 서로 신뢰하는 실제를 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국사를 담당할 신하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말을 시행하지 않고 계책을 사용하지 않으며 한갓 벼슬로 묶어 놓는다면 의지하고 신뢰하는 성의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광해 2년 12월 22일 영의정 이덕형을 가례 도감 도제조로 삼다 이덕형은 기국(器局)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재주가 뛰어났다. 〈약관에 벼슬길에 올라 청선(淸選)을 두루 거쳤으며, 문단(文壇)의 맹주로 활약하였고 군사 문제를 전담하여 처리하였다.〉 마흔 살이 채 못 되어 정승에 올랐으나 아름다운 명성을 잃지 않으니, 〈세상에서 훌륭한 재상으로 평가하였다.〉 다만 나라를 경영하는 데에 필요한 실질적인 재주가 없고 낭묘에 있으면서도 별달리 시행하는 일 없이 〈녹을 부지하고 지위를 보존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세(時勢)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매번 상소하여 해직되기를 구하였는데, 〈성심으로 사직하면서〉 늘 몸을 받들고 돌아가고자 하였으니, 〈이러한 점에서 훌륭하다 하겠다.〉 .
광해 5년 10월 9일 전 영의정 이덕형의 졸기 전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졸하였다. 이때 죄를 주자는 논계는 이미 중지되었는데, 덕형은 양근(楊根)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덕형은 일찍부터 공보(公輔)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李恒福)과 대등하였으나, 덕형이 관직에서는 가장 앞서 나이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난리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모두 그의 성명(聲名)에 복종하였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외구(外舅)인 이산해(李山海)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광해 3년 12월 15일 영의정과 우의정이 사직소를 올리다 이원익·이덕형·이항복은 〈어진 재상인데〉 한꺼번에 사직하여 〈삼공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었으니 시사(時事)가 이미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개 세 신하가 나랏일이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 또 더러 소인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병을 핑계대고 직위에서 떠남으로써 왕이 느껴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따뜻하게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광해 12년 9월 13일 사간원에서 이성구와 현즙·인천 현감 한급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구만 파직시키다 본문 참고

 

『광해군일기정초본』

일자 제목 본문 링크
광해 2년 2월 9일 사직을 청한 영의정 이덕형의 차자에 대한 답 사신은 논한다. 우리 나라 중엽 이래로는 대신들이 자기의 직분을 얻지 못하고 녹만을 받아 먹고 자리만 지키는 자가 많았다. 더구나 외척이 권세를 잡고 뭇 소인들이 조정에 포열하고 있는 때인데, 대신들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이덕형이 굳이 사양하는 뜻을 알 만하다.
광해 2년 3월 22일 영의정 이덕형이 사직을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 사신은 논한다. 임금의 직책은 정승을 잘 선택하는 데 있다. 지금의 삼공(三公)은 성상께서 지극히 엄선하였고 명망도 흡족한데 상하가 서로 신뢰하는 실제를 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국사를 담당할 신하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말을 시행하지 않고 계책을 사용하지 않으며 한갓 벼슬로 묶어 놓는다면 의지하고 신뢰하는 성의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광해 2년 12월 22일 영의정 이덕형을 가례 도감 도제조로 삼다 이덕형은 기국(器局)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재주가 뛰어났다. 마흔 살이 채 못 되어 정승에 올랐으나 아름다운 명성을 잃지 않으니, 다만 나라를 경영하는 데에 필요한 실질적인 재주가 없고 낭묘에 있으면서도 별달리 시행하는 일 없었다. 그러나 시세(時勢)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매번 상소하여 해직되기를 구하였는데, 늘 몸을 받들고 돌아가고자 하였다.
광해 5년 6월 13일 영의정 이덕형이 의녀로 하여금 대비전의 궁녀를 찾아보도록 아뢰니 따르다 이미 자전이라 불러 놓고 마치 여염집에서 수색하듯이 궁인들을 찾아냈으니, 대신이 옳은 일과 그른 일을 가려 말씀드려야 하는 의리가 과연 이렇단 말인가.
광해 5년 8월 8일 영의정 이덕형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이때 구신과 명사로서 조정에 근근히 용납받아 오던 자들이 모두 역당(逆黨)이라는 이유로 쫓겨나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덕형이 홀로 중망을 지녀 수상의 자리에 있었는데, 옥사를 국문하여 죄를 청하는 일에 있어서 힘껏 그때마다 참여하여 일에 따라 바로잡지 아니함이 없어 조그만 도움이나마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결정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 이견을 세우자니 큰 화를 입을 것 같았고 세속을 따르자니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술을 마시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백관이 정계함에 미쳐 삼사의 배척이 잇따르게 되자 비로소 상소하여 진정했는데, 말이 대부분 견강부회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했다.
광해 5년 10월 9일 전 영의정 이덕형의 졸기 전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졸하였다. 이때 죄를 주자는 논계는 이미 중지되었는데, 덕형은 양근(楊根)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덕형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그는 일찍부터 공보(公輔)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李恒福)과 대등하였는데, 31세에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38세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그의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들에게도 알려졌다.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있었을 때에는 왜인들에게 크게 존경받았으나 임진왜란에 이르러 적의 기세가 날로 급박해지자 조정에서는 이덕형으로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세력을 늦추도록 보내려 하였다. 이덕형이 명을 듣자마자 즉시 출발하므로 선조(宣祖)가 이에 감읍하였다. 가마가 평양에 도달하자 적장 현소(玄蘇)가 이덕형을 뵙기를 구하니 사람들이 이를 크게 위태롭게 여겼다. 이덕형이 한척의 배[單舸]로 찾아 가면서 조금의 두려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갑진록(甲辰錄) 호성공(扈聖功)에 이덕형의 충성과 노고가 기록되었음에도 봉작을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자 수상(首相)으로 흉배들에게 협박받았다. 비록 옥사에 성실히 참여했지만 친구를 대하면서 말이 시사에 미치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식음을 전폐하는 데 이르렀다. 차자로 영창대군의 원한을 논하면서 말이 조리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겼고, 오히려 이 때문에 죄를 받았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외구(外舅)인 이산해(李山海)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광해 12년 9월 13일
사간원에서 이성구와 현즙·인천 현감 한급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구만 파직시키다
본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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